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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사진

영월 붉은메밀꽃밭과 단종의 숨결이 어린 청령포

여행장소:강원도 영월군 삼옥리 먹골마을 붉은 메밀꽃밭,영월군 남면 광천리 단종의 유배지 청령포

여행일:2021년10월10일 일요일

 

*붉은 메밀꽃이 만개 했을때는 빨간고추가루를 뿌려놓은듯한 모습이지만 질무렵 방문이라 '희나리'고추가루를 뿌려놓은듯 허여멀개서 아름다움은 퇴색되었지만 나름운치는 있었다*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제2회 동강 붉은메밀꽃 축제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삼옥2리 먹골마을 동강 변 약25,000평 에 조성한 붉은 메밀꽃밭.

동강의 풍부한 하천 자원을 활용하여 삼옥리 천예의 자연의 동강변에 위치한 먹골마을 하천변 군 유휴지를 이용하여 붉은 메밀꽃밭을 조성해 푸른 동강을 찿는 관광객과 지역 주민에게 색다른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하천과자연,문화가 어우러지는 동강 붉은 메밀꽃밭 축제

포스트 코로나 시대 영월의 새로운 명소로 각광을 밭고있는 동강 붉은 메밀꽃 축제 .

2019년 부터 시범적으로 조성한 붉은 메밀꽃밭은 지역주민과 관광객에게 큰 호평을 받았으며, 특히 2020년 제1회 붉은 메밀꽃 축제를 통해 코로나 19의 어려운 여건속에서도 3만 여명의 방문하는등 큰 반응을 이끌어 냈으며 올해가 제2회로 축제를 개최했다

 

 

행복과 평화로움그리고 아름다움이 함께 하는 동강 붉은메밀꽃 축제

붉은 메밀꽃밭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영월에서만 몰 수 있는 가을 풍경으로,가만히 서서 보고만 있어도 힐링이 된다. 난생처음 보는 붉은 메밀꽃밭 사이를 걸으며 꽃들을 어루만져본다. 관광객 분들이 꽃을 밟지않고 다닐 수 있는 길도 만들어져 있다.자연 속에 있는 나자신이 행복함을 느낀다. 붉은 메밀밭은 아름답기도 하지만 평화롭다.

 

 

동강 변을 거닐며 붉은메밀꽃과 소중한 추억의 일기장을 써내려가는 관광객들~~

영월 동강 먹골마을에는 붉은 메밀꽃이 활짝피어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 들어  지역 효자 노릇 '톡톡'이 하고 있다.

화창한 가을 하늘 아래 빨갛게 핀  붉은 메밀꽃.마치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한 풍경에 사람들은 저마다 사진을 찍으며 추억을 남기고 있다.

 

 

붉은 메밀꽃밭에서 추억의 일기장을 연출하는 관광객들

국내 유일한 홍메밀꽃밭, 지금은 붉은 메밀꽃이 많이 져서 그런지 많은 관광객은 보이지 않아  그렇게 복잡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동강이 흐르는 강변, 기암절벽아래 뗏목이 흐르고 홍메밀 꽃과 멋지게 어우러져 한폭의  아름다운 동양화를 연상하게 한다.

 

 

붉은꽃이 손을 간질이는 메밀꽃밭에서~~

'메밀꽃'이라고 하면 소금을 흩뿌린 것처럼 새하얀 꽃을 생각하게 되고단편 소설 작가인 이효석의 작품 ‘메밀꽃 필 무렵’의 배경지인 봉평 메밀꽃 축제를  생각하게 된다.그러나 이곳 영월에는  동강을 따라 붉은 메밀꽃이 길게 붉은 메밀꽃밭이 조성돼 관광객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아주 색달라서 좋다. 우리가 하얀 메밀꽃만 봤는데 이곳 동강먹골마을에서 지금은 많이 졌지만  붉은 메밀꽃밭을 거닐고 있다. 활짝 필 때  다시 한 번 오고 싶은 곳이다.

 

 

수려한 자연경관과 풍부한 수량을 자랑하는 동강에서 펼쳐지는 동강 뗏목 체험

뗏목은 60년대까지만 해도 서민들의 땀과 애환을 실어 나르던 중요한 교통수단이자 생활수단이었다. 하지만 교통이 발달되고 경제가 발전하면서 그 모습을 감췄다. 그러다 지난 1997년, 전통문화 계승과 동강을 알리기 위한 영월인들의 노력으로 다시 동강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이곳 홍메밀꽃 축제장에도 뗏목체험프로그램이 있어 관광객을 불러들인다.

대인 9,000원 소인 7,000원.  10인이상 활인가 대인 6,000원,소인5,000원.  영월군민 대인5,000원, 소인 4,000원 가격이 제법 있내요

 

 

한폭의 그림을 보여 주는 듯한 동강 붉은 메밀꽃

동강 먹골마을은 붉은 메밀꽃이라는 색다른 볼거리로 새로운 명소로 떠오르며, 지역 경기에 활기를 가져오고 있다.

코로나 19로1월 25일에서 17일까지 단축 운영 축제가 열리지만 관광객의 발길이 계속 이어릴것이다.붉은 메밀꽃이 지기시작했으니 방문 하시려면 하루 빨리 방문하는게 좋을듯.



제2회 동강 붉은 메밀꽃 축제

2021년 지역형 생활문화 활성화 지원시범사업으로 붉은 메밀꽃과 함께 각종 문화 예술공연도 함께 한다.  

공연장에는고전 무용의 하나인 사방에 걸어 놓은 다섯 개의 북을 치면서 춤을 춘다는 오고-무[五鼓舞]가??설치되고 있다.

공연시간을 물어보니 오후 4시란다.  반갑고 흥겨운 무대라는 생각은 들지만 시간상 관람은 포기~~

 

 

길위의 갤러리

2021 지역형 생활문화 활성화지원  시범사업으로 열리는 길위의 갤러리 .

문화체육관광부와 지역문화진흥원에서 주최하고  영월문화원이 주관하는 길위의 갤러리는 홍메밀꽃과 함께 그림과 시가 있어 오가는 관광객의 발걸음을 멈추게한다.

 

 

푸른하늘과 함께 붉은 꽃밭을 걷고 있는 관광객들~~

푸른 하늘과 하얀구름이 동강에 들어 앉아있는 가을날, 동강변을 따라 지금은 지고있는 시기이지만 예쁜 붉은메밀 꽃이 흐드러지게 피여있다.2019년 영월군이 마을 하천 주변 유휴지를 이용해 만든 붉은 메밀밭.입소문을 타고 알려지면서, 지난해 소규모로 개최한 마을 축제가 제2회를 맞이하여 많은 방문객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아 주민들은 꽃을 보러 온 관광객들에게 지역 먹거리와 농산물을 판매해 새로운 소득을 창출하고 있다.

 

 

 

제2회 동강 붉은 메밀꽃 축제 장터

 붉은 메밀꽃 구경하다 허기가 지면 들려보자!  붉은 메밀꽃밭 도로 변에 조그마한 장터가 열리고 있다.

보리밥,감자떡,감자만두, 메밀국수, 메밀전등 마을에서 직접 음식등을 제작,판매하여 찿아오는 관광객들에게 볼거리와 먹거리를 제공 한다.

 

 

KBS2  해피선데이 시즌3  1박2일  548회 육해공 올림픽편 촬영 장소 영월  동강  조은 펜션 
붉은 고추가루를 뿌려 놓은듯한 붉은 메밀꽃밭

축구장 11개 규모의 땅을 가득 채운 붉은메밀꽃밭.동강의 흐르는 물결과 초록초록한 산과 풀 , 파란 하늘까지 꽃밭 옆에는 초록초록한 풍경들이 가득하다.봉평의 하얀 메밀꽃밭이 소금을 뿌린 듯한 풍경으로 숨이 막힐 지경이라면  동강 붉은메밀꽃밭은 붉은 고추가루를 뿌린듯한 풍경으로 숨이 막힐 지경이다.

 

 

동강의 메밀꽃은 가을보다 아름답다

가을 붉은메밀꽃밭을 거닐었다면  봄에는 초록빛 청보리밭으로 변신해 싱그러운 물결을 연출하고 있을 것이다

주민들은 내년 봄 이곳에 청보리와 꽃양귀비 등을 심어, 사계절 내내 관광객이 찾는 명소를 만들 계획이다. 

동강변 붉은 메밀꽃밭 3만3000㎡ 부지에 국립종자원에서 구입한 청보리 씨앗을 파종해서 동강의 푸른 빛과 어우러진 푸른 보리밭이 장관을 이루면 관광객과 사진작가들의 발길이 이어질것이다.내년봄을 기대해 본다.

 

 

동강의 붉은 메밀꽃과 함께한후 단종의 혼이 담긴 청령포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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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령포(淸泠浦)

청령포 주차장에 주차시키고 단종대왕의 얼이 섞인 청령포로 발걸음을 옮긴다

청령포는 수림지로 소나무숲이 울창하고, 서강의 물이 맑아 영월팔경의 하나로 손꼽히는 명소이다.

1971년 12월 16일 강원도기념물 제5호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12월 26일 명승 제50호로 변경되었다.

천연기념물인 ‘관음송’을 비롯하여 단종의 어가 주변에 조성된 크고 오래된 소나무림이 270° 돌아흐르는 서강과 어우러져 자연 경관이 뛰어난 명승지이다.원래는 영월군에서 관리하였으나 2009년 명승지로 지정되면서 문화재청으로 이관되어서 문화재청 장릉관리소에서 겸임 관리를 하고있다

 

 

두견새 우는 청령포 노래비(청령포의  슬픈 역사를 둘러보기전 주차장 부근에 있는곳에서  이 비를 만난다.)

  견새 우는 청령포 (작사:이만진, 작곡:한복남, 노래:심수경)

 

왕관을 벗어놓고 영월땅이 왠말이냐

두견새 벗을 삼고 슬픈 노래 부르며

한양천리 바라보고 원한으로 삼년세월

아, 애달픈 어린 임금 장릉에 잠들었네

 

두견새 구슬프게 지저귀는 청령포야

치솟은 기암절벽 구비치는 물결은

 말해다오 그 옛날에 단종대왕 귀향살이

아, 오백년 그 역사에 비각만 남고 있네

 

동강물 맑은물에 비춰주는 달을 보며

님가신 길을 따라 꽃과 같이 사라진

아름다운 궁녀들의 그 절개가 장하구나

아, 낙화암 그 절벽엔 진달래 피고지네

 

 

단종대왕 유배길 호송의 책임을 맡은 금부도사 왕방연 시

조선시대 문신 왕방연(王邦衍)이 금부도사(禁府都事)로 있었는데 사육신(死六臣) 사건이 있은 뒤 1457년(세조 3년)에 왕명에 따라 상왕(上王) 단종이 노산군(魯山君)으로 격하되어 영월(寧越)로 유배 될때 호송 하고 서울로 돌아가는 길 내내 마음이 무겁고 착잡했다 한다.유배지를 향해 떠나는 단종이 갈증으로 인해 물을 마시고 싶어했으나 물 한 그릇도 국법에 어긋난다 하여 올리지 못했던 그는 찢어지는듯한 마음을 가눌길 없었다 하는데 ...

이런 왕방연을 시켜  또 다시 단종대왕에게 사약을 전하게 했으니 참으로 가혹하고 몰염치한 세조대왕이었다.서울로 돌아온 왕방연은 관직을 그만두고 선산이 있는 봉화산 아래 먹골(지금의 중랑구 묵동)에 자리를 잡아 필묵과 벗하며 키우기 시작한 것이 배나무였다 한다.유배지를 떠나는 단종이 갈증으로 인해 물을 마시고 싶어했으나 물 한 그릇도 국법에 어긋난다 하여 올리지 못했던 그는 단종이 승하한 날이 되면 자신이 가꾼 배나무에서 수확한 배를 바구니에 가득 담아 진설하고 영월을 향해 4배(四拜)를 올렸다 한다.

그때 왕방연이 읊은 피눈물의 시 한수를 읊으니 이러하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千 里 遠 遠 道    美 人 別 離 秋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此 心 未 所 着    下 馬 臨 川 流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川 流 亦 如 我    嗚 咽 去 不 休

 

 

청령포 주차장의 타일 모자이크로 새겨진 단종대왕 유배길 (애띤 얼굴이 애처럽게보인다)

영월군 남면 광천리 남한강 상류에 위치한 단종의 유배지로, 1971년 강원도 기념물제5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 제6대 왕인 단종이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상왕으로 있다가,그 다음해인 1446년 성삼문 등 사육신들의 상왕복위의 움직임이 사전에 누설됨으로써 상왕은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중추부사 노득해가 거느리는 군졸 50인의 호위를 받으며 원주, 주천을 거쳐 이곳 청령포에 유배되었다.

 

 

오백년만의 해후(邂逅)  작가-송주철

청계천 영도교를 건너 영월 청령포에 유배되어 영영 돌아갈수 없었던 조선의 비운의 왕 단종

청령포는 단종과 정순왕후의 슬픈 별리(別離)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500년이 지나 오늘에 이른 역사는 단종과 정순왕후의 재회를 희망한다, 이곳에 우리 모두의 염원을 담아 "500년만의 해후"를 형상으로 남겨 교훈을 되새기려한다

작품해설:남녀가 교차된 형상은 단종과 정순왕후의 결합과 재회를 의미하고 가로 원판의 수직반복은 영원성과 점층적인 역사의 흐름을 의미한다.녹이 나는 조형물 재료의 물성은 시간의 흐름과 역사를 암사한다.

 

 

청렴표 매표소입장료(3,000원)

영월은 조선시대 제 6대 왕으로 이곳에 유배되었다가 삼촌인 세조로부터 자살을 강요당하고 결국 죽음을 맞이했던 단종과 관계가 깊은 곳이라 영월을 지날때 마다  꼭 한번 와보고 싶었던 곳이었는데,마침 동강변을 따라 예쁜 붉은홍메밀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다고 해서 겸사겸사 여행을 하게 되었다.

 

 

단종대왕이 머무르덩 청령포(淸泠浦)

청령포는 서강이라는 하천이 구불구불 흐르면허 마치 뱀이 기어가는 모습과 같은 곡류(사행천)가 발달한 지역으로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50호로 지정되어있다.하천이 곡류하게 되면 곡류하는 안쪽은 물이 흐르는 속도가 느려지고,반대로 바깥쪽은 빨라져서,안쪽에는 자갈이나 모래가 쌓이고,반대로 바깥쪽은 하천변이 깎여 말발굽 모양의 물길이 발달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말발굽 모양의 물길은 더욱 심하게 구부러지고,마침내 잘록한 부분이 끊어지면서 하천은 직선으로 흐르면서 주변에는 곡류가 잘린 구부러진 물길이 그대로 남게 되는데이를 '구하도'라 한다.청령포앞에는 과거 서강이 크게 구부러져 흘렀던 방절리 구하도가 있다,방절리 구하도는 과거 경작지로 이용되었으나 현재는 공원으로 조성되었으며,국내에서 대규모의 '구하도'형태를 볼수있는 자연학습장이다.영월 청령포는 어린 나이에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긴 단종의 유배지로 서쪽은 험준한 암벽이 솟아 있고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섬과같이 형성된 곳이다.

 

 

청령포(淸泠浦)로 유배를 떠나는 여행객, 유배지에서 나오는 여행객들

강바람이 불어와 등을 시원하게 하지만 마음은 숙연한 채로 과거 단종이 유배생활했던 청령포로 발걸음을 옮긴다. 

과거에는 양쪽에 줄을 매어 놓고 배를 탄 후 줄을 끌어당겨 건넜다고 한다. 지금은 모터를 단 배가 다니고 있다.

영월에서 서쪽으로 3km 쯤 달리면 남한강 상류의 지류인 서강(西江)이 그림같이 굽어도는 형국에 마치 육지속의 섬처럼 아름다운 별천지가 하나 있다. 동,북,서가 모두 깊은 물로 막히고 육지와 이어지는 남쪽은 험준한 육로봉의 층암절벽으로 막혀 있어 가히 절애고도(絶崖孤島)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오죽 했으면 이곳에 원통히 유배되었던 단종대왕(端宗大王)께서 육지고도(陸地孤島)라 하였겠는가?그저 무정한 세월은 쉴새없이 흐르고 강변의 초목들은 피고지기를 거듭 하건만 한번 떠나신 님의 원혼이야 그 누가 있어 위로해 드릴것인가? 사육신인가? 생육신인가? ...그들도 고혼이 된지 수수백년에..

 

건너편 청령포 입구 자갈길은 단종이 탈출방지를 위해 소나무를 모두 베어버렸다고 전해진다.
산림청 공인지정 천년의 숲 우수상을 수상한 청령포.

강원도 영월의 청령포(淸冷浦)는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한 단종의 유배지다.강을 건너 청령포에 배가 닿는다. 시원한 강바람과 함께 200미터의 자갈길이 드러나 있다. 단종 유배 시 그가 이곳을 벗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소나무를 모두 베어 버렸다고 한다. 그 길을 조금 걸어가면 곧 영월 최대의 관광지 역할을 하고 있는 소나무 숲에 이른다.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 제5회(2004년) 공존상(우수상)을 수상한 강원 영월 청렴포 숲

단종을 위로하던 관음송과 소나무 숲 - 영월 청령포

청령포는 홍수와 산사태를 막고, 방풍 및 방사 등의 기능을 지닌 수림지(樹林地)다. 영월군 남면 광천리 산67-1 일원 청령포에 위치한  수림지는 수십년에서 수백년 생의 거송들이 들어찬 수림지로 단종의 유배처를 중시으로 주위에 울창한 송림을 이루고 있다주변 수백 그루의 소나무들을 둘러보니 키가 20미터에 이르고 흉고직경은 80센티미터인 것도 꽤 많다. 이렇듯 굵은 소나무들은 비교적 곧게 자랐으나 가는 나무들은 비틀림이 심하다.송림을 보니 단종의 슬픔이 전해져 오는 듯, 마음이 쓸쓸하다.

 

 

 

청령포 안내

지금 청령포에는 단종어소와 함께 단종 유배시에 세운 금표비(禁標碑)와 영조때 세운 단묘유지비(端廟遺址碑)가 서있어 옛일을 전하고 있다. 또한 정순황후(定順王后)그리며 쌓있다는망향탑, 단종이 한양을 바라보며시름에 잠겼다고 하는 노산대, 소나무에 걸터앉아 쉬면서 시름을 달래셨다고 하는 관음송이 있다. 

 

 

 

단종어가 낙성고유축문

단종어가낙성고유축문이라 함은 단종이 계시던 집을 다시 복원하고 경진년에(서2000년)영월군수가 이 축문을 지었다는 이야기다. 글자 그대로 옮겨본다

端宗御家落成告由祝文           단종어가낙성고유축문

維歲次 庚辰二月 癸亥 甲辰     유세차 경진이월 계해갑진       경진년 2월(200년4월6일)

 寧越郡守 金泰洙 敢昭告于      영월군수 김태수 감소고우      영월군수 김태수 감히 고하나이다.

端宗大王                            단종대왕                           단종대왕이시여

國運回泰 寧越가福      국운회태 영월가복              나라의 운이 크게 돌아와 영월의 상서로운 복이 오도다

奉安神位 至誠行禮      봉안신위 지성행례             신위를 봉안하여 지성으로예를 행함니다

大王薨後 不顧御家       대왕훙후 불고어가            대왕께서 돌아가신후 어가를 돌보지 못 하다가

郡民總意 今此落成       군민총의 금차낙성            군민의 총의를 모아 금일에야 낙성하게 되었으니

不勝悲感 懺悔不忠      불승비감 회회불충                 슬픈마음 이길 길 없고 신민된 출정 부족함을 진실로 뉘우칩니다

 四千萬民 哀哀孤魂     사천만민 애애고혼              4천만 국민 모두가 대왕의외로운 혼을 슬퍼하고 슬퍼합니자

 懷悔往事 不息落淚     회회왕사 불식낙루             지나간 일을 생각하면 흐르는 눈물 금할길 없슴니다

 雖立昊天 衆星供仰      수립호천 중성공앙            비록 하늘 저편에 계시나 뭇별들이 숭앙하고 있슴니다

 復元御家 晩時之嘆      복원어가 만시지탄            어가를 복원함이 너무나 늦은 느낌이 있으나

 淸泠古宅 作亂不復      청령고택 작란불복            이제 청령포 옛 어가에 다시는 지난날과 같이 어지러움 없을 것이니

平安降臨 受百姓享      평안강림 수백성향             평안하게 강림하여 백성들의 추앙을 받으소서

 伏惟                       복유                               엎드려 비옵건데

 尊靈  歆饗素饌         존령 흠향소찬                   존령이시여 흠향하시고

尤加庇護 維保寧越     우가비호 유보영월             더욱 우리를 비호하여 주시고 영월을 평안케 하여 주소서 

  玆敢告由 虔告謹告   자감고유 건고근고              이에 감히 고유드립니다

 

 

단종단종어가 부속건물.심부름을 하는 궁녀들이 기거하던 행랑채

청령포(淸泠浦)는 명승 제50호로 조선왕조 제6대 임금인 단종이 157년(세조3)에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처음으로 유배(流配)되었던 곳이다.삼면이 깊은 강물로 둘러싸여 있고 한쪽은 험준한 절벽으로 막혀 있어서,배로 강을 건너지 않으면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유배지로 적합한 곳이다.단종은 1457년 6월28일 부터 두 달 동안 이곳에서 유배 생활을 하다가 , 그 해 여름에 홍수로 청령포가 범람하여 영월읍 영흥리에 있는 관풍헌(觀風軒)으로 옮겨서유배 생활을 하였다,1726년 (영조2)에는 단종의 유배지를 보호하기 위하여 일반인의 출입을 금하는 금표비(禁標碑)를 세웠고 ,1763년(영조39)9월에는 영조가 친필로 '단묘재본부시유지端廟在本府時遺址'라는 비문을 써서 단종이 살던 집터에 비를 세우고 비각을 건립하였다.2000년 4월에는 단종이 거쳐하던곳에 정면5칸, 측면2칸 반 규모의 겹처마에 팔작지붕 형식으로 기와집을 복원 하였고, 부속 건물로 정면5칸,측면1칸반의 규모로 홑처마에우진각 지붕형식으로 초가집을 건립하였다.

 

 

궁녀 및 관노들이 기거하던 행랑채에는 밀납인형으로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단종어가의 부속건물 행랑채는 궁녀들이 머물면서 단종대왕을 보필하던 집이다, 지금이야 갈끔하게 정돈되어 이렇겠지만 그 옛날의 형편이야 오죽 했을까?밀납 인형으로 당시의 모습을(상,좌) 바늘질하고 있는 침모(針母),(상,우)다듬이질 하고 있는 시녀,(하,좌)시종(侍從)의 침실(寢室),(하,우)부엌일하고 있는 식모(食母) 재현해주고 있다.

 

 

단종을 향해 큰절하는 충절소나무가 마당으로 뻗어 자라고 있다

담 밖에서 시작해 수평으로 15미터쯤 앞마당에 길게 누운 소나무 한 그루가 특별히 눈에 띈다. 

단종의 어소를 향해 큰절을 올리는듯한 모습으로 굽어있는 소나무.가지가 모두 집 안쪽으로 향해 늘어져 자라고 있다.

 

 

端廟在本府詩遺址(단묘재본부시유지) :단종임금께서 이곳에 계실때의 터 라는 이야기이다.

단묘재본부시유지비는 1763년 세워진 것으로 총 높이 162cm로 밑으로 1단의 화강석 비좌 위에 오석으로 된 비신을 세우고전면에는 「端廟在本府時遺址」(단묘재본부시유지:단종이 이곳에 곗실때 옛터이다.)라는 글이 영조대왕의 친필로 음각되어있고, 후면에는 「皇命崇禎戊辰紀元後三癸未季秋泣涕敬書 令原營 竪石 地名 淸泠浦」(황명숭정무진기원후삼계미계추읍체경서 영원영수석 지명 청령포. 영조 39년 계미년 가을 울면서 받들어 쓰고 , 어명에 의하여 원주 감영에서 세워웠다. 지명은 철령포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단종어소(端宗御所):단종어소는 승정원 일기의 기록에 따라 기와집으로 그 당시의 모습을 재현했다.

이곳이 단종임금께서 유배기간동안 머물러 계시던 집이다.

단종은 1441년 7월 23일(세종23년)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사이에서 원자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홍위(弘暐)이다.8세가 되던 1448년(세종30년)에 왕세손에 책봉되었고,예문관제학 윤상(尹祥)으로부터 학문을 배웠다.1450년 2월 (세종32년)에 세종이 승하하고 문종이 즉위하게 되자 그해 7월 20일 왕세손이었던 홍위는 10세의 나이로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며1452년 5월 18일 문종이 승하후 단종은 경복궁 근정전에서 12세의 어린 나이로 제6대 왕에 즉위하였다,1454년 1월22일(단종2년) 14세때 여량군(礪良君) 송현수(宋玹壽)의 따님을 왕후로 맞으니 이가 곧 정순황후(定順王后)로서 수를 82세까지 누리긴 하였으나 그 삶이 어떠했겠는가?계유정난(癸酉靖難)이후 1455년 6월 11일 단종은 세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15세에 상왕이 되었으며 (재위기간1452년~1455년), 박팽년, 성삼문 등이 단종의 복위(復位)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모두 죽임을 당하는 사육신사건이 일어나 1457년 (세조3년) 노산군으로 강봉된 뒤 1457년 윤 6월 22일 창덕궁을 출발하여 7일 후인 윤 6월 28일 유배지인 영월 청령포로 유배되었다.그해 9월 금성대군 유(瑜)가 다시 그의 복위를 꾀하다가 사사되자 단종은  노산군에서 서인으로 내려지고 결국 죽음을 강요당해 1457년 10월 24일 유시에 17세의 어린 나이로 관풍헌에서 승하 하였다.

 

 

어소(御所)에는  밀납인형으로 당시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단종의 어소는 단종이 생전이 머물렀던 곳으로 이 곳에서 글을 읽거나 휴식을 취하였으며 밤에 몰래 찾아온 엄흥도와 대화를 나누었던 공간이기도 하다. 엄흥도는 매일 밤이 되면 청령포 강을 건너서 어소에 자주 들리면서 단종이 암살되어서 영면할 때까지 그의 말동무가 되어서 외로움을 달래주었던 것으로 전해진다.단종이 영면하게 되었을 때는 최후까지 그의 시신을 영월읍으로 이동하여 안장하였고 이것이 후의 장릉으로 불리게 된다.

 

 

단종대왕 침소

청령포는 동, 남, 북 삼면이 물로 둘러싸이고 서쪽으로는 육육봉(六六峰)이라 불리는 험준한 암벽이 솟아있어 나룻배를 이용하지 않고는 밖으로 출입할 수없는 마치 섬과도 같은 곳이다.단종은 이 적막한 곳에서 외부와 두절된 유배생활을 했으며, 당시에는 이곳에 거처할 수 있는 집이 있어 호장 엄흥도는 남몰래 밤이면 이곳을찾아 문안을드렸다고 전한다. 그 해 뜻밖의 큰 홍수로 강물이 범람하여 청령포가 물에 잠기게 되니 단종은 영월 동헌인 관풍헌의 객사로 처소를 옮겼다.

 

 

御製詩 (어제시)

단종어가 대청에 걸린 어제시가 있어 적어 보았다.

御製詩 (어제시)

千秋無限寃 (천추무한원) 천추의 한 가슴깊이 품은 채
 寂寧荒山裡 (적영황산리) 적막한 영월땅 황량한 산속에서
萬古一孤魂 (만고일고혼) 만고의 외로운 혼이 홀로 헤매이는데 
蒼松繞舊圓 (창송요구원) 푸른솔은 옛동산에 우거졌구나
嶺樹三天老 (영수삼천노) 고개위의 소나무는 삼계에 늙었고
溪流得石喧 (계류득석훤) 냇물은 돌에 부딪쳐 소란도 하고나
山深多虎豹 (산심다호표) 산이 깊어 맹수도 득실거리니 
不夕掩紫門 (불석엄자문) 저물기 전에 사립문 닫노라

 

 

청령포 경치는 가히 절경이며 그 경관의 주인공은 단연 소나무 숲이다.  

수십 년에서 수백 년생의 거송들이 들 어 찬 청령포 수림지는 단종의 유배처를 중심으로 주위에  울창한 송림을 이루고 있다.청령포는 폭이 50미터쯤 되며 가운데가 약간 볼록한 완만한 곡선을 그리고 있다. 큰 산이 든든하게 숲 뒤를 지키고, 앞에는 초록빛을 띤 강이 흐르고 있다. 그래서인지, 지금의 청령포는 유배지라기보다는 소나무에 둘러싸인 안온한 휴식처 같은 느낌을 준다. 

 

 

단종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들은 관음송(觀音松)

단종의 슬픈 이야기를 간직한 관음송. 높이 30m, 줄기 둘레는 5m나 되는 거목이다

관음송이라 함은 곧 단종 이곳 청령포로 유배되어 있을때 자주 이 나무로 오셔서 두 갈래로 갈라진 이 소나무에 걸터앉아 쉬면서 시름을 달래셨다 한다. 그때 통한의 눈물과 한탄 하는모습을 이 나무가 보았고 (觀:볼관) 그 비통한 울음과 탄식을 들었다(音:소리음)는데서 붙여진 이름이다.관음송에 얽힌 또 다른 이야기도 있다. 나라에 큰 변이 있을 때 나무껍질이 검은색으로 변해 변고를 알려 주었다고 하여 마을 사람들이 이 나무를 매우 신성시했다는 이야기다. 
소나무 크기는 높이 30m, 가슴높이의 둘레 5m로 지상에서 두 갈래로 갈라져 동,서로 비스듬히 자랐다.갈라진 줄기의 밑둘레는 3.3m, 남북 20m로 가지를 펼치고 있다. 웅장하지는 않지만 순박함과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수령은 600년으로 보고 있는데, 이는 단종 유배시의 수령을 80년으로 하여 계산된 것이다.단종 유배시의 설화를 간직하고 있는 관음송은 1988년 천연기념물 제349호로 지정되었다.



단종이 왕비 송씨를 생각하며  흙보다 돌이 많은곳을 올랐던 길이 이제는 메크계단이 설치되었다.

단종어가에서 서쪽으로 80미터쯤 오르면 망향탑이다. 망향탑으로 오르는 길은 짧지만 경사가 급하며 데크계단이 설치되여져 있고 주변에는 떡갈나무나와 굴참나무가 서있고 그곳을 조금 더 오르면 시야가 훤히 트인 1미터 높이의 망향탑이 나온다. 망향탑은  단종이 왕비 송씨를 생각하며 그때마다 돌을 주워 탑을 쌓고 안녕을 빌던 곳이다. 망향탑에서 조금더 오르면  서강이 조망되는 전망대가 나온다.

 

 

망향탑(望鄕塔), 이곳에서 단종이 왕비 송씨를 그리워하면서 쌓았다고 하는 조그만 돌탑이다.  

청령포 뒷산 육육봉(六六峯) 과 노산대(魯山臺) 사이 층암절벽 위에 있는 탑으로 어린 단종대왕이 청령포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이곳에 올라 한양땅을 그리며 자신의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근심속에서도 한양에 두고 온 왕비 송씨(정순황후 定順王后) 생각하며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막돌을 주워 쌓아올렸다는 탑으로 단종이 남긴 유일한 유적이다.정순황후(定順王后)는 수(壽)를 82세까지 누리긴 하였으나 그 삶이 어떠했겠는가?단종과정순왕후의 서로에 대한 그리움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함을 느끼단.

 

 

청령포 전망대

청령포 유래:청령포는 1457년 6월22일 조선왕조(조선왕朝鮮王朝)제6대 임금인 단종대왕(端宗大王)께서 왕위를  찬탈 당하고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유배(流配)되어 계셨던 곳으로 당시 이곳에 단종대왕 거처(居處)인 어소(御所)가 있었으나 소실(逍失)되고, 청령포라는 지명은 영조39년(1763)에  영조가 직접 端廟在本府詩遺址(단묘재본부시유지)라는 글씨를 써서 내렸고, 이것을 화강석 비좌 위에 올려진 비신에 새겨 어소위치(御所位置)를 전하고 있다. 이 비는 단종어가 앞마당에 세워진 비각 안에 안치되어 있는데 즉 단종임금께서 이곳에 계실때의 터 라는 이야기이다. 비(碑)의 뒷면에는 1763년 9월에 원주감영으로 하여금 비를 세우게 하였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고, 지명을 청령포라고 썼다. 이로 보아 청령포라는 지명은 유래가 깊은 것으로 보인다.

 

 

자연이 만든 감옥 청령포

도도히 흐르는 서강의 물줄기는 예나지금이나 변함없건만 억울하게 돌아가신 님의 발자취를 찿자하니 가슴이 아려오고 눈시울이 적셔짐이 느겨온다.강원도 영월의 청령포淸冷浦는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한 단종의 유배지다. 남한강 상류에서 흘러내린 평창강이 땅의 삼면을 휘돌아 흐르고 육지와 이어진 남쪽은 험준한 절벽으로 가로막혀 있다. 강 이편에서 헤엄쳐 건널 수 있을 만큼 강폭이 좁지만 물살이 빨라 오직 배를 이용해야만 강을 건널 수 있다. 자연 감옥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셈이다. 어떻게 이런 곳을 유배지로 찾았는지 수양대군이 대단해 보일 정도다.

 

 

노산군(단종)이 매일 저녁 한양을 향한 원통함을 청령포에 곡하며 생이별한 정순왕후를 애타게 그리던 청령포 노산대 (淸泠浦 魯山臺)

망향탑 바로 옆에 있는 급한 절벽에 관광객의 안전을 위해 만든 울타리를 따라 단종이 앉아 있었다던 노산대로 간다.   노산대는 공사 중인지 코로나19의 영향인지는 알수는 없지만 출입이 통제 되여져 있다.노산대에 오르면 서강과 층암절벽이 그려내는 풍경이 시원하게 펼쳐진다.그러나 서울을 그리워하며 시름에 잠겼을 단종에게는 적막강산의 외로운 유배지를 실감 나게 했을 뿐일 것이다.이곳에 유배당했던 단종의 외로움을 짐작게 한다. 

 

 

 

수십년에서 수백년 거송들이 들어찬 단종의 유배처 청령포

울창한 소나무는 다른 방향에서 보아도 여전히 멋스럽다. 청령포 솔숲은 역사성이 뚜렷하고 풍광이 뛰어나 잘 보전해야 할 숲이다. 어미나무가 쇠퇴한 뒤를 대비하여 최근에 어린 소나무를 심어 놓은 것이 보인다. 큰 나무가 지녔던 슬픔을 극복하고 강건한 소나무로 자랐으면 좋겠다.오래된 거송들은 번호표를 부착해 관리하고 있다.사람과 숲의 조화로운 공존을 통해 이 아름다운 숲이 다음세대 까지 변함없이 보전되기를 기원한다

 

 

일반인이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도록 하는 의미로 세워진 '청령포금표비(淸冷浦禁標碑)'

소나무 숲 사이에서 강 쪽을 바라보고 서 있는 비석은 청령포 금표비*다. 석회암으로 만든 비신은 오랜 세월동안 풍화되면서 표면에 물결무늬가 잔뜩 새겨졌다. 그러나 무늬에 가리지 않고 청령포 금표禁標라는 큰 글씨는 잘 보인다. 비석 지붕은 화강암으로 만들었지만 한쪽이 떨어져 나갔고 이끼가 끼었다가 죽어서인지 검은 색을 띄고 있다.

전면은'청령포금표(淸冷浦禁標)'라고 쓰여져 있고 후면에는  '동서삼백척(東西三百尺) 남북사백구십척(南北四百九十尺) 차후생역재당금(此後生亦在當禁) 숭정 구십구년崇禎九十九年'이라고 쓰여 있다.해석을 하면 이 청령포의 동서로 삼백척,남북으로 사백구십척 출입을 금하노라! 또한 진흙이 쌓여 생겨난 땅 또한 같다 할것이다.숭정구십구년. 이 내용으로 보아 단종을 이곳에 유배 시키고 그 당시에 단종의 출입을 금지하는 뜻인듯 한데 (역사적 사실 보존차원)숭정구십구년이면 명나라 의종황제의 재위 첫해로부터 99년인데 숭정원년이 1628년이니까 이 비는 1727년에 세워진것임을 알수 있다.그러므로 영조대왕(재위1724∼1776) 시대에 세웠다는 이야기가 되고 영조대왕이 역사적 유물을 복원해 놓은것이다.

 

 

청령포에서 유배생활을  끝내고 육지로 나가려는 사람들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다. 손님이 많을 때는 배 2, 3척이 번갈아 실어 나른다. 

 아름다운 송림(松林) 속에 단종이 유배되어 있어다 하니, 아름다운 자연속에 통한의 역사를 심은 현장이었다.

남한강 상류에서 흘러내린 평창강이 땅의 삼면을 휘돌아 흐르고 육지와 이어진 남쪽은 험준한 절벽으로 가로막혀 있다.
청령포에 들어가고 나오려면 배를 타고 강을 건너야 한다. 단종의 유배지였던 이곳은 앞으로 강물이 휘돌아 나가고 뒤쪽은 험준한 절벽으로 이루어진 천혜의 감옥이나 다름없다.그 천혜의 감옥을 배를 타고 나가려한다.

 

 

 강원도 영월의 청령포淸冷浦는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한 단종의 유배지다.

한창 가물 때면 물이 줄어 강폭이 30미터에 불과한데, 과거에는 양쪽에 줄을 매어 놓고 배를 탄 후 줄을 끌어당겨 건넜다고 한다. 지금은 모터를 단 배가 다니고 있다.단종은 주변이 강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고립으로 인한 외로움과 그리움이 사무쳤을 것 같다. 정말 슬픈 역사의 장소로, 천연기념물인 관음송과 울창한 소나무숲 등단종의 유배살이의 설움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다.그곳을  배로 이동하는 시간이 5분도 안걸린채 빠져 나오고 있다.

 

 

여행을 즐거움을 느껴본 영월 붉은 메밀꽃밭과 청령포

돌아오는 길에 다시  저 건너 송림과 무정한 강물을 바라본다.아무리 보아도 강물은 잔잔 하건만 소리없는 통곡이 저 강 가득 차 있는것만 같았다.청령포 솔숲을 산책하는 데는 1시간이면 충분하다. 일정을 여유 있게 잡아 건너편 왕방연 시조비도 둘러보고, 숲에 한참 머물다 오는 것도 좋다.현시대를 살고있는 우리에게도  많은 교훈을 주는 유적지이다.  

답답한 도시를 떠나 여행의 즐거움을 만끽하며 붉은 메밀꽃밭과 청령포 여행기 여기서 마침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