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일:2023년5월14일 일요일
산행지:의상능선
산행친구:나홀로 산행
민족의 침략에 대비하여 축조한 북한산성. 그러나 북한산성은 축성 후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채 오랜 세월 지나는 동안 허물어졌다. 그 뒤 복원한 북한산성의 성곽을 둘러보면 부국강병(富國强兵)만이 살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북한산 북한천계곡은 산길을 걷는 동안 물 흐르는 소리와 새 우짖는 소리가 가득하며, 걸음을 옮길 때마다 성곽과 성문, 누각, 사찰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어 산행의 즐거움을 안겨준다.
왕도 지나갔고, 대통령도 드나든 문. 대서문은 북한산성의 정문이다. 숙종은 어린 영조를 데리고(1712년), 영조는 다시 왕세손이었던 정조와 함께 북한산성을 찾았다(1772년). “3대에 걸친 왕들이 북한산성을 찾았는데, 숙종만 정문인 대서문을 이용했다”며 “영조가 1760년에 북한산성을 찾았을 때는 대성문을, 1772년에는 대남문을 입구로 이용했다”고 밝혔다. 그래서 서울 은평구 진관동 산성입구에서 대서문을 지나는 탐방로를 ‘숙종의 길’로 부른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에 있는 북한산국립공원 산성탐방지원센터에서 얼마 걷지 않아 둘로 나뉘는 갈래 길이 나온다. 왼쪽으로 접어들면 계곡을 따라 걷는 길이 나오고, 비교적 너르고 잘 닦여 있는 오른쪽 차도가 대서문으로 가는 길이다.
암릉산행과 체력에 자신 있다면 의상능선 가장 아래 봉우리인 의상봉부터 시작해 용출·용혈·증취를 거쳐 나월·나한봉을 타는 것이 가장 교과서적인 산행이다. 북한산성탐방지원센터에서 의상능선을 주파해 청수동암문까지 4km 거리이지만 경사가 심하고, 주의를 요하는 바윗길이 있어 최소 2시간 이상은 잡아야 한다. 하산은 문수봉에 올랐다가 대남문에서 구기동으로 하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삼천사에서 부왕동암문으로 올라와 나월·나한봉을 타고 삼천사로 원점회귀도 가능하다. 체력과 시간만 충분하다면 의상능선이 끝나는 문수봉에서 다양한 코스를 잡을 수 있다.
북한산 서암사는 조선숙종 37년(1711년) 에 북한산성 축성이후 한양 북쪽 수구문 일대 산성의 수비를 위해 13개 사찰들 중 하나로 규모는 133칸으로 팔도 도총섭 광헌(승려)가 창건 하였다. 서암사는 승려들이 수행하며 훈련을 하던 호국승병 사찰이었지만 혼돈기인 19세기말 을축년(1925년 7월)대홍수로 매몰되었다. 고려 충숙왕때 첨의 정승을 지냈던 문인공 민지(1248~1326년)의 유지가 있던 곳에 창건되어 민지사라 불리웠으나 후,사면을 서쪽에 있다하여 서암사로 부르게 되었다. 문화유산 보존을 위해 2006년 부터 현 서암사 주지 혜안스님이 발굴 및 복원사업을 진행 중이다.
북한산 계곡에 물이 많이 흐르니, 계곡 주변에서 자라는 나무의 초록 잎과 형형색색의 꽃이 더 아름다웠고 등산객들의 표정도 밝아보였다. 북한산은 워낙 길이 많기 때문에 아무리 사람이 붐벼도 조용한 산행을 즐길 수 있다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소재의 지역은 2006년 3월부터 추진된 북한산성지구 이주 및 정비사업을 통해 철거및 정비한 곳으로 과거, 대성산장이 자리 잡고 있던 곳이다. 예전부터 북한동 마을은 살구나무(열매)가 많이 자라나는 지역으로 매우 유명했기에 행화촌(살구나무 杏,꽃 花, 마을 村)이라 불리웠던 곳이다.
이곳에서 대남문으로 향한다. '숙종의 길'은 계곡길이 아닌 우측 포장길로 무량사~중성문~산영루~금위영이건기비~대남문으로 가야하지만 내가산행할곳은계곡길 올라 다시 이곳으로 하산할 계획을 세워본다.
북한산 선봉사의 싯다르타상.‘숙종의 길’ 중간 선봉사에는 오른손은 하늘을, 왼손은 땅을 가리키는 싯다르타 상(像)이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 '을 외치며 석가탄신일 을기다리고 있었다. 싯다르타는 후일 깨달음을 얻어 샤카모니(석가모니)가 됐다.
이곳 갈림길에서 국녕사~의상봉 ~ 용출봉 ~ 용혈봉 ~ 증취봉 ~ 나월봉 ~ 나한봉 ~ 문수봉 ~ 대남문을 거쳐 북한산성 금위영이건기비~산영루~중성문 통과해 다시 이곳에 도착하여 북한산성입구 들머리로 원점회귀하는 산행코스가 오늘의 일정이다.일정은 생각일뿐 구기터널로 하산할지 아니면 이곳으로 원점회귀 할지는 대남문에 도착해서 생각을 해 봐야지~~??
석가탄신일을 앞둔 북한산 크고작은 사찰에는 연등을 달아놓았다. 연등은 연꽃의 련(蓮)이 아니라 불을 붙이거나 태운다는 ‘연’(燃)자를 쓴다. 따라서‘연등(燃燈)’은 ‘등에 불을 밝힌다’는 뜻이다. 이는 석가모니가 이곳저곳을 다니며 깨달음을 전파한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물로 등을 켜놓았던 풍습에서 비롯됐다.
용(龍)이 승천했다고 전해오는 용출봉(龍出峰)은 미묘하고 신령스런기운이 깃든 봉우리다.국녕대불(國寧大佛)은 그로부터 흘러내려 용(龍)의 심장에 해당하는 곳으로 알려진 용 심혈(龍 心穴)에 자리잡고 있는 국내는 물론 동양최대의 좌불이다. 국녕대불(國寧大佛)은 삼각산은 물론 서울과 수도권을 지켜주는 부처님이시다.
1711년(숙종 37년)에 북한산성을 축성한 뒤, 성내의 군사 요충지에 사찰 13곳을 건립하여 산성의 수비와 성곽 관리를 맡겼다. 이런 사찰을 승영사찰이라 하는데, 이곳에 승군을 주둔시키고 무기를 보관하는 창고를 두어 병영의 역할을 겸하게 하였다. 국녕사는 북한산성의 축성과 함께 창건된 승영사찰의 하나로 당시엔 86칸 규모였다. 사찰의 위치로 미루어 의상봉과 용출봉 사이의 성벽과, 그 중간에 위치한 가사당암문의 수비와 관리를 맡았을 것으로 짐작된다.국녕사는 갑오경장으로 의승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존속했지만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이후 보경(寶鏡) 스님에 의해 법등을 다시 밝히게 된 국녕사는 1991년 화재로 소실이 되는 불운을 겪기도 하였다. 지금의 국녕사는 1998년 폐허를 딛고 가람을 중창한 것이어서 예전의 모습은 찾을 길 없다. 그러나 사찰의 역사 속에 면면히 흐르는 호국의 의지는 언제까지나 남아 있을 것이다.
국립공원에서 의상능선 코스는 ‘매우 어려움’으로 분류한 코스답게 산행은 쉽지 않지만, 주의하면 어렵지도 않다. 어렵다 해도 국립공원 정규등산로이니, 낭떠러지 바윗길엔 나무데크계단이 설치되여져 있고 철제난간 시설이 있어 집중하면 그리 힘들지 않게 산행할수 있다.
가사당 암문(袈裟堂暗門)은 북한산의 의상봉과 용출봉 사이의 고갯마루에 위치해 있다. 1711(숙종 37) 북한산성 성곽을 축조하면서 만든 8개의 암문(暗門) 중 하나로, 현제 백화사가 위치한 의상봉 길에서 북한산성으로 오르는 길목을 통제하기 위해 설치했다. 암문은 비상시에 병기나 식량을 반입하는 통로이자, 때로는 구원병의 출입로로 활용된 일종의 비상출입구이다. 산성의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적이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고갯마루나 능선에 설치했다.가사당 암문은 여느 암문과 마찬가지로 성문 상부에 문루(門樓)는 마련하지 않았다. 성문 양쪽은 장대석으로 쌓아올리고, 그 위 천장 부분은 장대석 여러 매를 걸쳐 만들었다. 이런 형식의 성문을 아치 모양의 홍예식과 구분하여 평거식(平据式)이라 부른다. 원래 문짝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문짝을 달았던 원형의 지도릿 돌과 일반 문의 빗장에 해당되는 장군 목을 걸었던 방형 구멍이 남아있다.가사당 암문 아래에는 국녕사(國寧寺)가 자리 잡고 있다. 국녕사는 북한산성의 축조. 수비. 관리에 큰 역할을 담당하였던 승병이 주둔한 승영사찰(僧營寺刹)이었었는데, 가사당 암문의 수축과 방어를 담당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 까닭에 가사당 암문은 국녕문(國寧門) 으로도 불린다.
의상봉은 가파른 기암절벽으로 형성된 봉우리를 가리키는 의상'대(臺)'로도 불렸을 만큼 곧추서 있다.전국에 의상봉이란 이름을 가진 봉우리는 한 백개는 되지 않을까. 그만큼 신라시대 의상대사가 전국 곳곳을 누비고 끼친 영향도 컸던 모양이다. 경북 영주 부석사의 조사당 앞에는 '선비화'란 나무가 철책으로 보호되고 있는데, 의상이 부석사를 창건하고 떠나면서 심어놓은 지팡이가 나무로 자란 것이라는 전설이 전한다. 바로 그때 의상이 간 곳이 북한산 의상봉 아래라고 조선 숙종·영조대의 승려 성능이 지은 '북한지(北漢誌)'에는 적혀 있다.'북한지'에는 지금과 달리 의상봉과 용출봉 사이에 '미륵봉'이라는 봉우리가 하나 더 있는 것으로 기록돼 있다.봉우리가 있다가 사라졌을 리는 없고, 의상봉은 봉우리 두개가 합쳐진 듯하게 생겨 있는데 아마 옛적에는 각각에 이름을 붙였던 모양이다.
『택리지(擇里志)』를 쓴 이중환은 땅의 기운이 가장 승한 곳으로 나라 안에서 네 곳을 꼽았다. 개성의 오관산, 한양의 삼각산(북한산), 진잠(대전)의 계룡산, 문화의 구월산을 정기가 빼어난 명산으로 보았다. 그 가운데서도 삼각산을 으뜸으로 꼽았다. 북한산은 수도 서울의 주산이요 진산이다. 삼국시대 이래 한국사의 중심이 되어 온 이 지역은 한민족의 문화와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온 불교와도 밀접한 연관을 가지며 조선시대까지 이어 왔다.
북한산 의상봉 능선:북한산성 대서문 방면에 있는 봉우리 의상봉(義湘峰) 502m의 봉우리를 시작으로 용출봉, 용혈봉, 증취봉, 나월봉, 나한봉, 상원봉(715봉), 문수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의상능선이 이어진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에 속하며, 명칭은 신라의 고승 의상(義湘)이 머물렀던 곳이라는 데서 유래하였다. 양쪽으로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 가까운 지형이지만 정상은 평탄한 편으로 북쪽으로 원효봉(元曉峰) 505m, 와 마주하고 있다.
한무리의 등산객이 릿지코스를 이용해 의상봉을 향해 오르고 있다. 몇년전만 해도 나도 저렇게 겁없이 릿지 산행을 나홀로 하곤 했다. 하지만 환갑을 넘기고 60중반을 넘어 70을 향해 달리고 있는 지금은 마음만으로 그려 보며 입가에 미소를 띄어본다.
용이 솟아오르듯 뾰족하여 부르게 되었다는 용출봉(龍出峰). 용출봉 정상은 소나무로 둘러싸여 있다.
지금처럼 계단과 쇠밧줄, 안전설비가 제대로 없던 시절에 의상능선은 전부 위험구간이었다.의상능선은 쉽지 않은 등산로를 암반을 넘기도 하며 로프 설치된 곳을 오르기도 한다.
북한산 예찬론자들이 워낙 많아 좋아하는 코스도 제각각이지만 '의상능선'을 선호하는 코스로 꼽는 이들이 가장 많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예전에 의상능선은 '산 좀 탄다' 하는 사람들이 통과할 수 있는 코스였다. '의상능선 타고 왔다'하면 북한산 산행을 제대로 했다고 하던 시절도 있었다.
북한산은 산 전체가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어 나뭇잎이 떨어진 겨울철에는 거대한 하나의 바윗덩어리로 보인다. 이는 중생대 말기에 형성된 화강암이 지반의 상승과 침식작용으로 서서히 겉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노출된 암반은 오랫동안 풍화작용을 거치면서 지금과 같이 험준하고 경사가 심한 산세를 이루게 되었다.
의상능선의 한가운데 등줄기를 이루는 용출봉龍出峰(571m)·용혈봉龍穴峰(581m)·증취봉甑炊峰(593m)은 의상능선의 ‘백미’로 꼽힐 정도로 아름다운 암릉미를 자랑하는 삼연봉이다. 오르내림이 심하고, 두 손을 모두 사용해야 통과할 수 있는 구간들이 많다.
북한산(北漢山)은 서울시 북부와 경기도 고양시의 경계에 있으며 서울 근교에 있는 산 중에서 가장 높고 산세가 웅장하다. 북한산은 고려 때부터 삼각산이라 불리다가 일제강점기 이후 북한산이라 불리기 시작했는데, 이는 북한산 연봉 가운데 가장 높은 백운대(836.5m), 인수봉(810.5m), 만경대(787m) 세 봉우리가 멀리서 바라보면 큰 삼각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의상봉에서 용출봉(571m)으로 가자면 뚝 떨어졌다 오르면 용혈봉이다.용혈봉은 해발 581m, 북한산 등산코스 중 '의상능선' 상에'증취봉'과 '용출봉' 사이에 위치해 있다.한자를 풀이해 보면 용 용(龍) 구멍 혈(穴)이다. 아마 이곳 어딘가 동굴에서 용이 살았나 보다??.
코끼리 목을 타고 가야할 증취봉,나월봉, 나한봉을 향해 느린 걸음으로 달려간다.
용출봉과 용혈봉(581m), 증취봉(593m) 사이가 기기묘묘한 암반길이어서 의상능선의 '백미'라 할 수 있다. 한 가지 주의점. 2007년 7월 하순에 용혈봉 정상에서 끔찍한 낙뢰사고가 있었다. 무려 4명이 죽고 4명이 부상을 당했다.용혈봉은 봉우리에 나무도 없이 바위여서 등산객이 바로 '피뢰침'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생긴 사고다. 비 오는 날은 의상능선을 타지 말아야 한다. 중간에 비를 만난다면 스틱 등 쇠붙이를 잘 간수해야 한다.
증취봉에 대한 유래를 이곳 저곳 기웃거리며 찿아 보았지만 그 유래를 찿을 수가 없었다, 한자를 풀이 해보니 시루 증(甑) 불땔 취 (峰)로 표기 된다.시루 라 하면 떡이나 쌀 따위를 찌는 데 쓰는 둥근 질그릇을 말하는데 의상 대사가 이곳에 와서 시루에 불을 때서 떡을 해 드셨나?? 아니면 스님들이 이곳으로 소풍나오셔서 시루에 불을 때서 떡을 해 드셨나??북한 산성을 지키던 병사들이 시루에 불을 때 밥을 해 드셨나?? ㅋ ㅋ 그냥 대로 해석을 해본다.
나월봉(651m)·나한봉(692m)은 알려지지 않은 명봉이다. 능선 위로는 문수봉이라는 걸출한 암봉이 있고, 아래에는 훤칠한 암봉인 의상봉과 용출봉이 있어 화려함이 가리었다. 의상능선 중간에 두 봉우리가 있어 산행 중 지나치는 봉우리로 인식되는 것도 있고, 나월봉은 우회하는 것이 일반적이라 사람들이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있다.나월봉은 우회해 뒤쪽에서 난간을 넘어가면 기막힌 경치가 펼쳐지는 암릉지대에 닿는다. 막아 놓았으나 편안한 흙길이라 어렵지 않다. 나한봉으로 가는 길에 트인 바윗길이 많다.
나월봉(羅月峰)은 암봉이 달을 닮았다 하여 생겼다는 설이 있으며, 개성 천마산 나월봉과 비슷하다고 해서 그리 불린다는 설도 있다.기본 등산로는 나월봉을 우회하도록 되어 있어 일반적이라 사람들이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있다.나역시 나월봉을 그냥 지나쳐 왔다.
부왕동암문(扶王洞暗門)은 북한산의 나월봉과 증취봉 사이의 고갯마루에 위치해 있다. 외부는 홍예 모양으로 만들었고, 내부에는 성의 바깥쪽으로 문을 달았던 흔적이 남아있다.
화강암 바위산인 북한산(北漢山)은 울창하고 아름다운 산세가 등산객과 어우러져 자연 속에 녹아 들어간다.한 폭의 그림 같은 산이다. 특히 북한산성은 북한산의 여러 봉우리를 연결해 싸여있어 등산로가 성벽을 따라 이어진 곳이 많은데, 오르는 곳마다 절경이 펼쳐져 등산객들로 사랑받는 곳이기도 하다.
나한봉은 가깝게 자리한 문수사 천연동굴의 오백나한(五百羅漢)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측된다. 오백나한은 석가여래가 입적한 후 그의 가르침을 결집하기 위해 모인 오백 명의 아라한(阿羅漢이다.
치성(雉城)은 성곽의 시설 중 하나로, 성곽 일부분을 네모나게 돌출시켜 적들을 손쉽게 진압할 수 있게 만들었다.치성(雉城)의 '치'는 꿩이라는 뜻인데, 성곽 구조물의 생김새가 꿩의 머리처럼 돌출되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고 하며, 성곽의역활이 몸을 숨기고 주변을 살피는 꿩의 습성과 비슷하다고해서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보현봉(普賢峰)은 북한산 대남문 밖 남쪽에 있는 봉우리로서 높이는 해발714m이다.비봉. 문수봉과 함께 북한산 남쪽 의 주봉을 형성한다. 명칭은 마주보고 있는 문수봉의 동남쪽에 있다 하여, 4대보살(미륵,문수,관음, 보현)의 위취에서 동남쪽에 있는 보현보살(普賢普薩)의 이름을 따서 붙인것이다
의상능선에는 쇠밧줄로 오르는 코스가 여러곳이 있어 등산객이 많을 경우 오르내리는 사람이 서로 기다려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특히 주말에는 더~~
사계절 북한산에서 최고로 수려한 경치를 보여주는 의상능선이다.의상봉~용혈봉~용출봉~증취봉~아월봉에서 나한봉 까지 능선이 암릉이라 어려운 것도 있지만, 비탈을 올라야 하기에 체력적인 면에서 쉽지 않은 곳이다.
6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의상능선은 능선 자체도 험하게 아름답지만 그 전체가 북한산을 가장 잘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라고 보면 된다. 달리 의상능선이 아니다. 북한산 제1봉인 백운대와 그 왼쪽으로 늘어선 염초봉, 원효봉, 오른쪽의 만경대, 노적봉 등의 허옇고 거대한 암괴를 가장 화려하게 감상할 수 있는 위치에 의상능선이 놓여 있다.
사모바위가 고개를 들고 있는 비봉능선의 장관이 한눈에 들어온다. 비봉능선 전체를 볼 수 있는 곳도 의상능선이 유일하다.
성랑지는 성곽지대에 병사들이 머무는 초소를 말하는데 북한산성에는 143곳이 있었다고 한다.
청수동암문(淸水洞暗門)은 북한산의 나월봉과 문수봉 사이의 고갯마루에 위치해 있다. 1711년 숙종 37 북한산성 성곽을 축조하면서 설치한 8개의 암문(暗門) 중 하나로, 탕춘대성과 비봉에서 성 안쪽으로 들어오는 길목을 통제하기 위해 설치했다.
대서문(大西門)이 정문이라면 후문은 어디일까?. 대남문(大南門)이다..대남문은 북한산성의 출구다. 이 성문을 나오면 보토현과 북악산을 거쳐 경복궁으로 이어진다.대남문 동쪽으로는 보현봉이, 서쪽으로는 문수봉(이 있는데, 좌우에서 석가모니를 협시(夾侍)하는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에서 이름을 가져왔다. 북한산성의 출구인 대남문을 중시한다는 의미다.
대남문에서 구기분소 2.5Km, 산성탐방지원센터 5.2Km. 거리도 가깝고 집으로 가기도 편한 '구기분소'방향으로로 향하는 등산로를 이용하는게 당연하나 '구기분소'로 하산하는 길은 여러번 하산했던 길이기에 조금은 멀어도 "숙종의 길"을 택해 산행 들머리였던 '산성탐방지원센터'로 하산한다.
북한산성 축성의 주축인 금위영(禁衛營)은 조선 후기 오군영(五軍營) 가운데 가장 마지막에 설치된 군영으로 훈련도감, 어영청과 더불어 국왕 수호와 수도 방어의 핵심 군영이다. 당시 청와대 경호실 역할을 담당했던 금위영은 인조(仁祖) 때 기병(騎兵) 중에서 정병(精兵)을 선발해 병조 산하에 두었던 정초군(精抄軍)과 훈련도감의 별대(別隊)를 통합해 1682년(숙종 8)에 설치됐다.
성능(聖能: 조선시대 팔도도총섭을 역임한 승려)은 중성문 위, 북한산 13개 승영사찰의 중심인 중흥사에서 30년을 지냈다. 근처 봉성암에 그의 사리(舍利)를 안치한 부도(浮屠)가 있다. 중흥사는 태고사와 함께 북한산성 한가운데에 있다. 그런데, 태고(太古)는 원증국사 보우(普愚, 1301~1382)의 법호다. 조계종의 중시조다. “북한산성 축조와 사찰 배치는 승군을 요소요소에 배치하는 전략적 의미와 함께 역사 공간이자 문화 공간인 산성 위에 불교적 의미를 담으려던 노력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후기 승려 보우가 중수한 사찰로 이 절이 대찰(大刹)의 면모를 갖춘 것은 1713년(숙종 39)에 북한산성을 축성한 뒤이다. 축성 당시 30여 칸에 불과한 사찰이었으나, 성이 완성된 뒤 증축하여 136칸을 만들었다.1915년에 홍수로 무너진 뒤 한동안 중건되지 못하였으나, 2005년 지홍 스님이 주지로 부임하여 불사를 새로 시작하여 옛 모습을 거의 회복하였다. 현재 중흥사는 북한산의 중심 사찰로서 시민들로 하여금 북한산성의 문화를 향유케 하는 본부 역할을 하고 있다.
산영루지는 북한산성내 태고사 계곡과 중흥사 계곡이 만나는 자연암반 위에 세워진 3칸의 丁자형 누각으로 산 그림자가 수면에 비치는 곳이라 하여 “산영루”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1920년 전후시기에 홍수로 유실돼 10개의 기초석만 남아 이었으나 경기도와 고양시는 문화재 지정을 위해 수십 차례에 걸친 현지답사와 문헌조사, 고자료발굴 및 문화재전문가의 자문 등 관련 자료를 수집해 문화재 지정과 복원을 했다.
중성문은 대서문 보다 조금 작은 편이다.중성문은 역사 탐방의 출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천 년 역사를 자랑하는 노적사도 중성문을 통과해야 만날 수 있다.북한산성을 축성한 다음 해인 숙종 38년(1712년), 북한산성의 수비 보완 대책의 일환으로 성 안에 성을 겹쳐 축조했는데, 이 성이 바로 중성이다. 성곽의 규모는 영취봉과 증봉 방향으로 약 200m에 달하며 성문으로는 홍예 형태의 중성문 그리고 시구문, 수문을 건립하였다.행궁과 유영 등의 성내 시설물과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이 문의 단층 문루는 19세기 말, 수문은 1915년 8월의 홍수에 의해 소멸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곳 갈림길에서 국녕사를 거쳐 의상봉 ~ 용출봉 ~ 용혈봉 ~ 증취봉 ~ 나월봉 ~ 나한봉 ~ 문수봉 ~ 대남문을 거쳐 북한산성 금위영이건기비~산영루~중성문 통과해 다시 이곳에 도착하여 북한산성입구 들머리 발길을 옮긴다
무량사(無量寺)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464-1번지 북한산성 내에 자리한 대한불교법화종 사찰이다. 북한산에 자리한 무수히 많은 절들 중의 하나인 무량사는 산성 초입에 자리하고 있으며, 창건 연대는 그리 올라가지 않으나 절의 창건과 관련한 흥미로운 일화가 전하고 있다. 고종의 후궁인 순빈(淳嬪) 엄(嚴)씨가 이곳에 산신각을 짓고 약사불과 산신탱화를 모신 뒤 백일기도를 올려 아들을 낳았는데 이 아들이 바로 조선왕조의 마지막 왕인 영친왕 이은(李垠: 1897∼1970)이다.그 뒤부터 이 절은 백일기도를 올리면 소원을 들어주는 사찰로 알려져 순빈의 원당(願堂)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경내에 약수가 있어서 처음에는 약수암(藥水庵)이라고도 불렀다가 1980년에 무량(無量)스님이 주지로 부임한 뒤에 절 이름을 무량암이라 하였다가 다시 무량사(無量寺)로 바꿨다. 지금도 약사전에는 순빈이 모시고 백일기도를 올렸다고 전하는 약사불좌상과 산신탱화가 남아 있다.
대서문(大西門)은 북한산성 정문으로,성문 16곳중에서 가장 낮은 지점에 위치한다.1712년(숙종38)숙종이 북한산성에 행차했을때 이 대서문을 통해 성내로 들어갔다. 누각에는 <북한산성 대서문 중수기>가 걸려 있어 중수 내역을 전해준다. 이 대서문을 통과하여 중성문을 거쳐 대남문에 이르는 길은 북한산성의 주요 간선도로였는데,이 대문 3곳을 맡아서수비.관리 하였던 군부대는 어영청 우영이었다.대서문 문루에 걸려 있는 ‘大西門(대서문)’이라는 현판은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친필이라고 한다.그의 호 ‘우남(雩南)’이 새겨져 있다. 북한산성 승영사찰 13곳 중 하나였던 상운사에서 기거한 인연으로, 이승만 대통령은 1958년 대서문을 찾으면서 편액을 걸었다고 한다.
승려가 지휘해, 승려들이 만들었다는 북한산성. 둘레 12.7㎞, 내부 면적 6.2㎢의 거대한 구조물. 한 해 탐방객 수백만 명을 끌어당기는 구심력. 북한산성이다.숙종은 승려 성능(聖能)을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승군 최고직)에 임명해 북한산성을 짓게 했다. 삼국시대부터 뼈대를 갖췄던 산성은 9개월 만에 만들어졌다. 남한산성은 승려 각성(覺性)의 진두지휘로 3년 만에 지어졌으니(1624년), 한강 남북의 두 산성은 승군의 불심(佛心)과 노역이 갈고 다듬어진 공양(供養)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성을 쌓는 대가로 공명첩을 받아 군역을 면제받았는데, 그래도 막중한 노역이었음은 분명했고” “승려 외에 군인·도성민이 축성을 담당했다”
역사를 살펴보며 산행했던 "숙종의길" 산행기 여기서 마침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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