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일:2022년 임인년 새해첫날 1월1일 토요일
산행지:남한산성 남한산(南漢山)
남한산 성안에는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86호로 등록된 남한산 법화사지와 부도가 보존되어 있다. 이밖에 허물어져 가는 산성의 남문을 중수하여 보존하였고 마을 안쪽으로 임금이 납시어 활울 쏘았던 행궁터와 송암정(松巖亭)·관어정(觀魚亭)·영춘정(迎春亭) 같은 정자 등이 보존되고 있다.1971년3월 남한산성과 함께 총 36.4km²를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산의 사방이 평지로 둘러싸여 밤보다 낮이 길다고 하여 일장산(日長山) 혹은 주장산(晝長山)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남한산과 함께 고주몽의 셋째 아들인 온조(溫祚)가 남하하여 백제국을 일으킨 곳으로도 유명하다.원래 온조는 현재의 서울 풍납동에 토성을 쌓고 위례성이라 하여 백제국을 세웠으나 지세가 불안하고 협소하여 이곳으로 천도했다.
산행은 동문에서 시작한다. 남문(지하문)을거처영춘정-수어장대-서문-연주봉 옹성-북문-남한산-벌봉-동장대지를거쳐 다시 동문으로 오는 원점회귀(제5코스)를 이용한다.
옹성의 길 제4코스는 남문까지 제5코스 산성의 길과 같은 길을 걷는다.제4코스 옹성의 길은 산성의 약점을 보완하고자 했던 선조들의 고민을 느낄 수 있는 탐방코스로,대포에 대응한 방어시설인 제1남옹성,제2남옹성,제3남옹성을 볼 수 있는 탐방코스다.4코스 옹성의 길은 굳건한 성벽과 옹성 그리고 야생화를 비롯한 자연환경이 어우러져 있어 세계유산 남한산성의 평화로운 모습을체험할수 있다.
암문은 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한 문으로,일종의 비밀통로이기 때문에 크기도 작고 적에게 쉽게 식별될 수 있는 시서로 설치하지 않았다.남한산성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암문이 마련되어 있는데,모두 16개의 암문이 있다.암문은 세계문화유산 남한산성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 중 하나의 군사경관(암문)에 해당한다.
남한산성은 조선시대의 성곽이 갖춰야 할 성내 시설이 완벽하다. 본성 외에 봉암성, 한봉성 2개의 외성을 갖추고 있으며, 남쪽에는 두 개의 돈대가 있다. 본성에는 5개의 옹성이 있으며, 20여 개의 포루를 설치해 화포공격이 가능하도록 했다. 성벽에는 4대문 외에 16개의 암문이 있으며, 성벽 위에는 1,940여 개의 타로 구성된 여장이 구비되고, 각 타에는 원총안과 근총안이 설치됐다. 성벽 안쪽에는 125개에 달하는 군포가 구축되어 있다. 군포와 군포 사이에는 90여 군데의 소금을 묻어둔 매염 터와 숯을 묻어둔 매탄 터가 있었고, 성 내에는 유사시에 대비해 충분한 식량과 군수물자가 보관되어 있다.
옹성(甕城)이란 일반적으로 성문을 외부에서 2중으로 둘린 성벽을 옹성이라 한다.남한산성에는 병자호란을 치른 경험을 바탕으로 중요지점에 5개의 옹성을 마련했다. 남한산성에 마련된 옹성은 서북측에 연주봉옹송, 동쪽에 장경사 신지옹성(長慶寺信地壅城), 그리고 남쪽 검단산을 마주하는 지점에 3개의 포대인 옹성이 있다.그중 한곳인 이곳이 제 3옹성이다.
5코스 산성의 길 은 "하늘이 만든 성"으로 알려진 남한산성의 성벽을 두루 볼 수 있는 탐방코스이다. 남한산성을 지키는 성벽을 따라 암문과 치성 등 방어시설물을 볼 수 있다.산성의 길에서 남한산성 성벽의 경관과 성남,하남,광주의 경관을 모두 볼 수 있어 세계유산 남한산성의 다채로운 모습을 체험 할 수 있다.
제5코스는 경기도 남한산성 세계유산센터-동문-동장대터-북문-서문-수어장대-영춘정-남문-동문을 거치는 7.7Km거리로 약200분 정도 소요된다.
군포(軍鋪)는 성을 지키기 위한 초소 건물이다.중정남한지(重訂南漢誌,1847)기록에 따르면 남한산성 내에 125개소의 군포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는 한군데도 남아 있지 않다.발굴조사 결과 군포는 약간 높고 평탄한 대지 위에 있었고,정면 3칸,측면 1칸 규모로 건축했다.건물의 모양은 맞배지붕에 기와를 얹고 토석벽을 두른 형태로 초소기능에 맞게 정면이 트여 있다.
장대란 지휘와 관측을 위해 군사적 목적으로 지은 누각 건물로 남한산성에는 5개의 장대가 있었다. 이곳은 남장대가 있었던 곳으로 성의 남쪽에 있다 하여 남장대라 불린다.이 곳에는 남한산성에 주둔하던 수어청에 소속된 5영 중 전영장을 지휘하던 곳이다.제2남옹성 바로 안쪽에 있었던 장대로 주변 지형을 보더라도 장대가 위치할 입지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17788년 부윤 이대영이 수어장대와 같이 이층으로 고치고 타운루라는 편액을 걸었으나,지금은 둥글게 잘 다듬어진 주춧돌만 남아있다.남장대가 있는 이 지역은 제2남옹치를 설치하여 장대 앞의 면적을 넓힘과 동시에 3개의 남옹성을 설치한 점 등을 고려해 볼 때,전략적으로 중요한 장대임을 알 수 있다.
치(雉)는 성벽의 일부를 밖으로 돌출시켜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입체적으로 공격할 수 있도록 한 시설물 중의 하나로 남한산성에는 모두 다섯 개의 치(雉)가 설치되어 있으며,이 중 본성에 4개,봉암성에 1개가있다.제2남옹치는 남장대 바로 앞에 설치되어 있으며,남한산성에 설치된 치 중 가장 규모가 크다.남한산성은 대부분 성벽이 굴곡이 심하여 치가 별도로 필요하지 않으나 남쪽은 지형이 완만하고 성벽의 굴곡이 약하여 방어력을 높이기 위하여 설치하였다.
옹성은 일반적으로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성문 밖으로 한 겹의 성벽을 더 둘러쌓은 이중의 성벽을 말한다.그러나 남한산성의 옹성은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3면에서 입체적으로 공격하고,요충지에 대한 거점 확보를 위해 성벽에 덧대어 설치한 시설물로 다른 성에서는 찿아보기어렵다.남한산성에는 모두 5개의 옹성이 있는데,이 중 3개의 옹성이 산성 남쪽의 완만한 지형을 보완하고 신남성으로부터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설치되었으며,제2남옹성은 이 3개 중 중앙에 있는 두 번째 옹성이다.제2남옹성은 둘레가 318m이며,다른 옹성과는 달리 이중으로되어 있는 것이 특색이다.포대는 동.서.남 3방향으로 설치되어 있다.본성과 연결되는 지점에는 전투시에 성내로 출입할 수 있도록 암문을 설치하였다.남한산성에 설치된 옹성중 규모가 가장 크다.
제1남옹성은 제2, 제3남옹성과 연주봉옹성 그리고 장경사신지옹성(長慶寺信地壅城)과 더불어 남한산성 5개 옹성 중 하나이다.제1남옹성은 다른 2곳의 남옹성들과 함께 병자호란 직후인 1638년(인조 16년)에 축성됐다. 제2남옹성과 제3남옹성의 포루가 청나라와의 외교적인 문제로 축조 이후 곧 헐어내고 다시 축성한 것과 달리, 제1남옹성은 초축 당시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특히, 남한산성 옹성 중에서 유일하게 옹성 내부에 장대(將臺, 전쟁 시나 군사훈련을 위해 마련한 장수 지휘소)를 설치해 본성의 수어장대와 나머지 남옹성 간에 연락을 취할 수 있게 한 점이 주목되는 점이다.
남한산성에는 동.서.남.북 에 4개의 대문이 있는데,남문은 남한산성에 있는 4대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한 중심문으로 현재에도출입이 가장 많은 곳이다.선조 때의 기록을 보면 동문,남문,수수문의 세문을 수축하였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남문은 인조2년(1624)수축되기 이전부터 이미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남문은 정조3년(1779)성곽을 보수할 때 개축하며 지하문(至和門) 으로 이름이 붙여졌으며 4대문 중 유일하게 현판이 남아있는 문이다.병자호란으로 인조가 처음 남한산성에 들어 올 때 바로 이 문을 통해서 들어왔다.
한 번도 함락되지 않은 천혜의 요새 남한산성, 하지만 왕(인조)이 스스로 무릎 끓고 나온 산성. 삼국시대(백제) 때부터 통일신라~고려~조선까지 면면히 이어온 산성. 6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는 축성술의 기술적 발달단계와 무기체제의 변화상을 보여 주는 산성. 유일하게 종묘와 사직 및 행궁을 갖춘 산성. 불교·유교·민속신앙 등 다양한 종교 유적지가 있는 산성. 구한말 항일 의병활동의 근거지였던 산성 등.남한산성의 역사적 가치는 무수히 많다. 역사적 가치를 되새기며 남한산성길을 나는 지금 걷고 있다.
남한산성은 볼거리가 많은 코스이다. 가파르거나 위험한 오르막길이 없어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걷기에 알맞다. 등산화보다는 가벼운 운동화를 신고 걸어도 괜찮다. 길은 포장도로와 계단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고 있다.등산로 중간 중간에 만나는 역사적인 장소가 있어 산행이 지루하지 않다. 등산로도 예쁘고 산행 시간도 길지 않아 등산 초보자에게는 안성맞춤인 코스이다.내리막, 오르막길이 있어 열심히 운동하는 기분이랄까. 다이어트가 목적인 사람들에게는 제격이다.
남한산성을 찾는 이유는 우선 등산로가 완만해서 남녀노소 누구나 힘들지 않게 쉽게 걸을 수 있다는 점이다. 등산로를 따라 혹은 성벽을 따라 걷는 사람을 보면 어린이가 부모를 따라 옹기종기 걷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고, 핸드백을 들고 살랑살랑 걷는 아줌마들도 많다.
남한산성(南漢山城) 정문격인 남문 북쪽편 전망이 좋은 언덕에 위치한 영춘정,이곳에서는 멀리 한강과 탄천 ,잠실의 아파트가 보임으로서 이곳이 상당히 높은곳에 위치해 있음을 알수 있다.병자호란 당시 청군이 주둔하고 있었으며 인조가 무릎을 끓고 항복한 장소인 삼전도비가 롯데 월드타워 석촌호수에 있다.
우리나라는 ‘산성(山城)’의 나라다.도읍지를 포함, 각 고을마다 시가지를 둘러싼 읍성(邑城)을 쌓았지만, 이 읍성들은 실전에서는 그다지 큰 방어효과가 없었다. ‘군사요새’로서의 기능 보다는 ‘도시의 울타리’ 역할에 더 충실한 성곽이었다.반면 방어용 요새(要塞) 역할은 산성이 맡았다삼국시대부터 전쟁이 터지면 조정과 관리, 군대 및 일반 백성들까지 도시를 버리고 험준한 산성으로 들어가 농성전(籠城戰)으로 적과 맞섰다. 가능한 한 적에게 이용될 수 있는 것들은 모두 불태우고서다. 바로 고구려 때부터 조선시대까지 이어진 청야전술(淸野戰術)이다.조선의 수도 한양에서는 북한산성과 남한산성이 그런 기능을 했다.
청량산(淸凉山)은경기도 하남시 학암동, 성남시 수정구 양지동, 서울시 송파구 마천동에 걸쳐 있는 산이다. 이곳에 사적 제57호로 지정된 남한산성이 위치한다.청량산은 일견 평범한 산처럼 보이지만 산속이 광대한 분지로 되어 있고 밖으로 험한 경사를 이뤄 천혜의 요새지로 평가되고 있다.또한 청량산 482.6m,남한산,벌봉 522m, 한봉 414m,검단산 538.1m으로 이어지고 있어 산세의 구별이 모호하다.남한산성은 정확히 말하면 청량산과 남한산 걸쳐 있다는 것이 맞는 표현일 것이다.금암산(金岩山, 322m)과 더불어 남한지맥의 지맥으로 분류되고 있다.
수어장대 들어가면 먼저 나오는 곳이 청량당 이다. 청량당 앞에는 아주 오래된 향나무가 있고 예전에는 보호수라는 팻말이 설치 되여져 있었지만, 향나무가 일제시기 잔존물로 얘기되면서 보호수라는 팻말이 사라졌다.
청량당(淸凉堂)은 남한산성을 쌓을 때 동남쪽 축성의 책임자였던 이회(李晦)장군과 그의 부인 넋을 기리기 위해건립된 사당이다.이회는 공사비를 횡령했다는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했고, 이 소식을 들은 부인 송씨는 한강에 몸을 던져 따라 죽었다.이회는 죽을 때, 자신의 죄가 없으면 매 한 마리가 날아올 것이라 예언을 했는데 과연 매가 날아와 그의죽음을 지켜보았다고 한다.후에 누명이 벗겨지고 그가맡은 공사가 가장 잘된 것으로 알려지자 사당을 지어 초상을 안치하고 넋을 기렸다.원래의 청량당은 6.25 전쟁 때 소실되어 다시 지었다.서장대가 있는 산 이름이 청량산이므로 청량당이라 이름 지었다.
수어장대옆 왼쪽마당에 있는 자태가 수려한 소나무. 방문객의 시선이 수어장대 못지 않게 사로잡는다.
남한산성은 수도권 최고의 소나무 군락지로 알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식생을 이룬 점도 매력적이다.
수어장대는 지휘와 관측을 위한 군사적 목적에서 지은 누각이다.남한산성에 있던 5개의 장대중 유일하게 남아 있으며, 성안에 남아 있는 건물중 가장 화려하고 웅장하다. 인조2년(1624) 남한산성 축성때 단층으로 지어 '서장대'라 불리던 것을 영조27년(1751) 유수 이기진이 왕명을 받아 2층으로 다시짓고 '수어장대(守禦將臺)'라고 편액(현판)을 달았다. 수어장대 2층 내부에는 무망루(無忘樓)라는 편액이 달려 있었는데, 병자호란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8년간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귀국하여 북벌을 이루지 못하고 승하한 효종의 원한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영조가 지은 것이다.현재 무망루 편액은 수어장대 오른쪽에 보호각을 지어(1989)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보관하고 있다.
조선 영조 27년(1751)광주유수 이기진(廣州留守 李箕鎭)이 증축한 수어장대 2층의 내편(內便)문루로서 그 편액(扁額)이 2층 누각에 있어 1989년 전각을 건립하고 이 안에 현판(懸板)을 새로 설치 일반인이 볼수있게 하였다. 무망루는 병자호란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8년간 청나라심양(瀋陽)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귀국 후 북벌(北伐)을 꾀하다 승하한 효종의 원한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영조가 이름지은 것이다
이회장군은 조선조 인조 2~4년(1624~1626) 사이에 지세가 험악한 산성 동남쪽의 축조 공사를 맡아 했는데, 워낙 지형이 험해서 제 날짜에 공사를 마감하지 못하자 장군을 시기하는 간신 무리들의 모함에 빠졌다. 장군이 주색잡기에 빠져서 공금을 탕진해 공기를 맞추지 못했다는 모함으로 인해, 서장대 앞뜰에서 참수를 당하게 되었다.이때 장군은 구차스런 변명을 하지 않고, '내가 죄가 없으면 죽는 순간에 매 한 마리가 날아오리라. 만일 매가 오지 않으면 내 죄가 죽어 마땅하지만, 매가 날아오면 죄가 없는 것이다'라고 했단다. 그런데 정말로 참형을 당하는 순간 매 한 마리가 날아와, 서장대 앞에 있는 바위에 앉아 죽임을 당하는 장군을 바라보고 슬피 울었다고 하여서 그 바위를 매 바위라고 불렀으며, 청량당 안에 매 바위의 화분(탱화)을 그려서 보관하고 있다.이회장군은 성의 축조를 완고히 하기 위해서, 송씨부인, 첩실인 유씨부인,을 삼남지방으로 보내 축성 비용을 모금케도 하였다. 축성자금을 마련하여 광주로 돌아오는 길에 장군의 비보를 들은 송씨부인과 유씨부인은, 비분을 금치 못하고 송파 강 머리에 몸을 던져 순절하고 말았다고 하여 당 안에 같이 모셔져 있다.
남한산성이 위치한 지금의 성남시,광주시,하남시는 예날 조선시대 행정구역으로 보면 모두 광주유수부의 관활지역 이었다.광주유수부는 남한산성의 군사요충지적 특성 때문에 매우 중요한 행정중심지였다. 또 남한산성은 왕의 이동과 관련이 깊은 곳이다.조선시대의 왕들은 반드시선대왕들의 능에 성묘를 가야 했으며 왕들의 이런 성묘행사를 능행이라고 불렀다.후대의 왕들이 영녕릉(英寧陵)에 참배를 하러 가려면 일 년에도 몇 차례씩 남한산성 옛길을 이용해 여주까지 가야했다.남한산성 옛길의 또 다른 특징은 조선후기 상거래가 활발해지면서 필요해진 내륙의 유통망으로 민간에서 이용했던 상업루트였다는 점이다.많은 보부상들이 바로 남한산성 옛길을 통해 상업유통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된다.이렇게 이용된 남한산성 옛길은 목적지인 경상북도 봉화의 이름을 따 통칭 봉화로라고 불렀다
남한산성에는 동.서.남.북에 4개의 대문이 있는데, 서문은 4개의 대문 중 규모가 가장 작고, 산성을 처음 쌓았을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정조 3년(1799)에 다른 문과 같이 개축하여 우익문(左翼門)이라 칭하였다.행궁을 중심으로 국왕은 남쪽을 바라보며 국정을 살피니.서문이 행궁 우측에 있어 우익문이라 하였다, 서문은 인조 15년(1637)1월30일 왕이 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항복하기 위해 남한산성을 나간 바로 그 문이다.남한산성의 서쪽 사면은 경사가 급해 물자수송이 어렵지만 광나루나 송파나루 방면에서 산성으로 진입하는 가장 빠른 길이다.
암문은 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한 성문으로,일종의 비밀 통로이기 때문에 크기도 작고, 적에게 쉽게 식별될 수 있는 시설도 설치 하지 않앗다. 이 암문은 영주봉 옷성으로 연결되는 통로로 서쪽에는 성벽에서 2m 정도 돌출된 치가 있고 북쪽으로는 직선길이 150m 정도의 연주봉옹성이 연결된다. 개구부 외부에는 홍예식이고 내부는 평거식이다.통로의 길이는 5m 정도로 천장은 장대석 5매로 덮여있다.
옹성은 일반적으로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성문 밖으로 한 겹의 성벽을 더 둘러쌓은 이중의 성벽을 말한다.그러나 남한산성의 옹성은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3면에서 입체적으로 공격하고 요충지에 대한 거점 확보를 위해 성벽에 덧대어 설치한 시설물로 다른 성에서는 찿아보기 어렵다,남한산성에는 모두 5개의 옹성이 있는데,이 옹성은 북서쪽의 요충지인 연주봉을 확보하기 위하여 설치하였다.연주봉에서 바라보면 아차산 북쪽과 남양주 일대의 한강이 조망되고 이성산성과 하남시춘궁동 일대가 특히 잘 보이며,성 내부의 지역도 관측되는 중요한 요충지이다.근래의 발굴조사 결과 옹성 끝에서 포대로 추정되는 유구가 확인되어 고증을 통하여 포대를 복원하였다.연주봉 옹성은 둘레는 315m이고 전투시에 성내로 출입할 수 있도록 옹성과 본성 성벽이 만나는 위치에 암문을 설치하였다.
≪택리지擇里志(조선 후기 실학사상이 반영된 인문 지리지)≫에서도 ‘남한산성은 한강 남쪽에 있고 중심지는 만 길이나 되는 산꼭대기 위에 있다. 옛날 백제 시조 온조왕의 옛 도읍이었던 곳이다. 가운데는 평평하고 바깥은 험고하며 형세가 웅장하여 마치 산꼭대기에 관을 쓴 것 같은 형상이다. 청나라 군사가 처음 왔을 때 칼날 하나 대보지 못했고, 병자호란 때도 끝내 함락되지 않았다. 인조가 성에서 내려온 것은 단지 양식이 부족하고 강화가 함락됐기 때문이다’고 기록하고 있다.
장대란 지휘와 관측을 위해 군사적 목적으로 지은 누각 건물로 남한산성에는 5개의 장대가 있었다. 이곳은 북장대가 있었던 곳으로 성의 북쪽에 있다 하여 북장대라 불린다.북장대는 인조2년(1624)남한산성 수축 시에 단층누각으로 지어졌던 것으로 보인다.이 곳에는 수어청에 소속된 5영 중 중영장을 지휘하던 곳이다.남한 산성의 장대는 18세기초에 붕과 되었고, 18세기 중엽에 이르러 남장대와 서장대는 다시 수축하였으나, 북장대와 동장대는 다시 짓지 않았다. 한봉성과 연주봉옹성의 축성으로 동장대나 북장대는 상징적인 의미만 있을 뿐 군사적인 실효성이 없어졌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북문은 성곽 북쪽의 해발 365m 지점에 있으며 전승문(戰勝門)이라고 한다. '전승문'이란 싸움에 패하지 않고 모두 승리한다는 뜻이다.1779년 성곽을 개보수할 때 개축하고 전승문이라 칭하였다.북문을 나서면 계곡으로 난 길을 따라 상사창동으로 이르게 되는데 조선 시대에 수문으로 옮긴 세곡(稅穀)을 등짐으로 이 문을 통해 산성 안으로 운반하였다. 선조때의 기록을 보면 산성 내에 동면과 남문, 수구문의 3개의 문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북문은 1624년에 신축된 성문이라고 생각된다.영화 ‘남한산성’에서는 지키기만 하던 조선군이 기습공격을 벌였다가, 전멸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당시 영의 정 김류의 주자에 의해 군사 300여명이북문을 열고 나가 공격하였으나 적의 계략에 바져 전멸하고 말았다.이를 '법화골 전투"하는데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 최대의 전투이자 최대의 패전 이였다
작은 나라가 만들어낸 조상의 얼이 깃든 문화유산 남한산성은 소나무와 울창한 자연림으로 둘러싼 숲이 주는 편안함과
거는도중 바라보는 풍경들은 마음의 여유와 휴식을 준다.남한산성에 깃든 옛 선인들의 지혜와 슬기로움, 강인한 정신력은 걷는 내내 뿌듯함으로 마음을 비우게 한다.
‘천작지성(天作之城)’이라고 할 만큼 천혜의 요새인 남한산성은 길이 평탄하고 숲이 우거져 단위면적당 방문객이 전국 최고수준에 이른다. 한 번도 함락된 적은 없지만 왕이 무릎 끓고 나온 치욕의 역사현장이기 하다.'천작지성'은 천혜의 요새라는 뜻을 가진 단어로 반계 유형원이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에서 남한산성을 묘사한 말이다.
성(城)이란 보통 성벽(城壁)을 말하는 것이지만, 그 의미는 매우 넓다. 처음에는 흙을 파서 도랑을 만들거나 흙으로 쌓았으나 사람들의 지혜가 발달하면서 나무로 만든 목책(木柵)과 돌로 쌓은 석축(石築), 벽돌로 쌓은 전축(磚築)도 생겼다.
전형적인 성곽은 네모꼴로 쌓은 성과 다시 그 바깥에 네모꼴로 쌓은 곽(郭)으로 구성되는 이중의 벽으로 구성된다. 안쪽의 것을 성, 또는 내성(內城)이라 하고, 바깥쪽의 것을 곽(郭) 혹은 외성(外城)이라고 한다.
서울의 중심부에서 동남쪽으로 2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남한산성은 광주시(廣州市)를 중심으로 성남·하남시에 걸쳐있다. 지형적으로 평균 고도 해발 480m 이상의 험준한 산세를 이용하여 방어력을 극대화한 곳으로, 둘레가 12km에 달한다.성곽 안에 도시가 생길 수 있을 정도로 넓은 분지이기 때문에, 백성과 함께 왕조가 대피할 수 있는 조선 왕실의 보장처(保障處, 전쟁 시 임금과 조정이 대피하는 곳)였다.
남한산성은 해발 500m가 넘는 험준한 자연지형을 따라 총 둘레 12km가 넘는 성벽을 구축해 많은 병력으로도 쉽게 공략할 수 없는 지리적 여건을 구비하고 있다. 또 내부가 넓고 평탄하며, 80여 개가 넘는 우물과 45개의 연못 등 수원(水源)이 풍부해 비축된 군량미만 충분하다면 수만 명의 병력 수용이 가능하다.실제로 남한산성은 함락된 적 없는 천혜의 요새지이다.
벌봉을 둘러싸고 있는남한산성의 외성 봉암성은 천혜의 요새답게 산세가 험해 병자호란 때 청태종과 청군이 이곳에서 진을 친 다음 전투는 하지 않고 인조와 조선군이 피신해 있는 남한산성을 내려다보면서 항복할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
암문은 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한 문으로, 일종의 비밀통로이기 때문에 크기도 작고, 적에게 쉽게 식별될 수 있는 시설도 설치하지 않았다.제3암문은 원성과 봉암성을 연결하는 주출입구로 다른 암문에 비해 매우 큰 편이다.윗 부분이 무지개 모양으로 반쯤 둥글게 만든 홍예문이며,규모 또한 폭이 2.36m,높이가 2.65m에 달해 성문의 역할까지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암문은 세계문화유산 남한산성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 중 하나인 군사경관(암문)에 해당한다.
남한산성은 단순한 하나의 성곽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본성,봉암성,한봉성,신남성과 5개의 옹성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구조이다. 이 중에서 봉암성은 본성의 동쪽인 동장대 부근에서 북동쪽의 능선을 따라 벌봉 일대를 포괄하여 쌓은 외성이다.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 내부의 동태를 훤히 조망할 수 있는 벌봉을 청군에 빼앗겨 곤란을 겪었는데,이러한 약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숙종 12년(1686)에 부윤 윤지선으로 하여금 성을 쌓게 하였고, 이 후에도 치성과 포대 등을 증측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봉암성은 남한산성의 본성에 대하여 새로 쌓은 성이므로 "신성"이라고도 하며, 동쪽의 성이므로"동성"이라고도 하였다.성의길이는 2,120m이다.
봉암성의 여장은 대부분 훼손되었지만, 성벽 몸체는 비교적 잘 남아있는 편이다. 성벽은 약 2~3m의 높이만 남아있다.
남한산과 벌봉 가는길은 3코스 승병의 길에 속해있다. 3코스 승병의 길은 조선후기 남한산성을 지키기 위해 8도에서 많은 승병들이 모여들었는데, 산성을 지킨 승병들이 머물렀던 사찰들을 볼 수 있는 탐방코스이다.승병들이 머물렀던 사찰이었던 장경사와 망월사,남한산성을 더욱 효율적으로 지킬 수 있게 만든 봉암성을 볼수있다.3코스 승병의 길은 사찰을 거닐며 세계유산 남한산성 고찰의 고즈넉한 모습을 체험할수 있는 탐방코스이다.제3코스는 경기도 남한산성 세계유산센터-현절사-벌봉-장경사-망월사-지수당-경기도 남한산성 세계유산센터로 돌아오는 5.7Km의 거리로 약 2시간 소요된다.
남한산은 광주산맥의 말단부에 위치한 산으로 천연 요새지에 성을 쌓아 삼국시대 이래로 산성의 산으로 잘 알려져 있다. 고구려 동명왕의 왕자였던 온조(溫祚)가 백제를 건국하여 위례성에 도읍한 후, 서기전 6년(온조왕 13)에 남한산으로 천도하였다고 한다.남한산 정상은 현 위치에서 한봉 방향으로 100m정도 더 올라가야 하나 남한산성 성곽의 보호를 위하여 이곳에 정상석을 설치하였다는 안내문과 함께 자리잡고있다.
남한산성의 의 최고봉인 남한산(522m)은 서울, 분당 등 수도권 남부 지역 주민들에게 인기 있는 해맞이 장소다. 현재 성안에 주민들이 살고 있기에 학교와 마을이 꾸며져 있고 도로가 산성 안쪽까지 이어져 있어 접근이 쉽고 산행도 크게 힘들지 않다. 일출을 본 뒤 산성을 따라 이어지는 산길을 타고 각 지역으로 연결되는 산행도 가능하다. 가벼운 차림으로 도전해도 좋을 해맞이 산이다. 남한산성도립공원은 성곽 일원 전체가 사적 제57호로 지정되어 있다.많은 사람들이 혼동하고 있듯이남한산성은 두개의 산에 걸쳐있는 산성이다. 남한산성의 대표적인 봉우리는 수어장대가 있는청량산(482.6m)이고 지형도상의 남한산성 최고봉은 39.4m가 더 높은 남한산(522m)이다. 어느 곳이나 일출을 감상하는 데는 지장이 없으나 아무래도 최고봉에 사람들이 많이 몰리기 마련이다.
암문 밖에서 이 바위를 보면 벌처럼 생겼다하여 벌봉이라 부른다. 병자호란 때 청 태종이 정기가 서려 있는 벌봉을 깨트려야 산선을 함락 시킬 수 있다하여 이 바위를 깨트리고 산성을 굴복시켰다는 전설이 있다.벌봉은 해발 512.2m로 남한산성의 수어장대(497m)보다 높기 때문에 남한산성의 서쪽 내부와 동쪽 성벽이 훤히 내려다보인다.병자호란 당시 이 지역을 청나라 군에 빼앗겨 적이 성 내부의 동태를 쉽게 파악할 수 있었으며,화포로 성안까지 포격할 수 있었다,
봉암성은 조선 숙종 때 본성의 방어력 보강을 위해 쌓은 외성이다. 내부에 벌봉(봉암)이 있어, 벌 봉(蜂)자를 쓴다.512.2m의 벌봉은 본성 내 최고봉인 청량산(482.6m)보다 더 높다. 인근 최정상인 남한산(南漢山. 522.1m)도 바로 옆이다.병자호란 때 청 태종이 직접 올라 대포를 쏘아대며, 항복을 압박했던 곳이 바로 여기다.봉암성에는 ‘동림사 터’, ‘외 동장대’와 ‘벌봉 암문’ 등 암문 3개가 더 있다.
봉암산성신축비는 숙종12년(1686)윤 4월1일부터 봉암을 쌓기 시작하여 같은해 5월9일 마무리한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비문의 형태는 자연석 위에 정사각형의 해서체로 음각되어 있으며,판독 가능한 49자외에 마모가 심하여 알아보기 힘든 몇 글자가 더 있다.비문을 통해 당시 광주유수 겸 수어사인 윤지선의 감독아래 봉암신성이 신축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장대란 지휘와 관측을 위해 군사적 목적으로 지은 누각 건물로 남한산성에는 5개의 장대가 있었다 이곳은 남한산성의 동북쪽 모서리 부분의 해발 501m지점으로, 성 동쪽에 있다 하여 동장대라 부른다.동장대는 남한산성에 주둔하던 수어청에 소속된 5영 중 좌영장(여주목사)이 지휘하던 곳이다, 동장대는 인조2년(1624)산성 수축 시에 설치되었고 누각도 함께 건립되었으나,18세기초에 무너진 것으로 보인다. 18세기 중엽에 이르러 남장대와 서장대는 다시 수축하였으나, 북장대와 동장대는 다시 짓지 않았다.동장대터는 세계문화유산 남한산성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 중 하나인 군사경관(장대)에 해당한다.
북한산성(北漢山城)은 북한산의 암봉들을 빙 둘러 쌓은 산성이다. 이를 ‘테뫼식’ 산성이라고 한다. 뫼(봉우리)에 테두리를 둘렀다는 뜻이다. 적의 직접적인 공격을 막는 데는 유리하지만, 산꼭대기에 있어, 장기간 포위당하는 지구전에는 불리하다. 보급, 특히 식수가 문제다.그 반대는 포곡식(抱谷式) 산성이다.상 안에 비교적 넓은 골짜기가 있고, 물이 풍부하다. 큰 성에는 촌락과 농경지까지 있어 장기 농성에 강점이 있다. 성곽의 규모도 테뫼식보다 상대적으로 크고, 면적이 넓다.남한산성(南漢山城)이 바로 대표적인 포곡식 산성이다.
옹성(甕城)은 일반적으로 성문을 보호하기 위하여 성문 밖으로 한 겹의 성벽을 더 둘러쌓는 이중의 성벽을 말한다. 그러나 남한산성의 옹성은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3면에서 입체적으로 공격하고, 요충지에 대한 거점 확보를 위하여 성벽에 덧대어 설치한 설치물로 다른 성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남한산성에는 모두 5개의 옹성이 있는데,장경사신지옹성은 한봉성과 봉암성에 대한 방어를 주목적으로 설치 되었으며,둘레가 159m이다.옹성 끝에는 2곳의 포대가 설치되었고 포루의 좌측 벽에는 이방이라 불리는 무기와 화약을 저장하는 시설이 있었다. 본성과 연결되는 지점에는 전투 시에 성내로 출입할 수 있도록 암문을 설치하였다.이것은 제2암문으로 ‘장경사신지옹성 암문’으로 불린다.
경기도 광주시의 북서부에 위치한 산이다. 『1872년지방지도』에 한봉(汗峯)으로 기록되어 있고, 『해동지도』와 『광여도』에는 남한산성 동문 아래 한봉(漢峰)으로 묘사되어 있다. 『중정남한지』에 "한봉(漢峯)은 남한산성의 동쪽에 있고 옛 이름은 한봉(汗峰)인데 성 안을 엿볼 수 있기때문에 돈보(墩堡)를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병자호란 당시 청태종이 이곳에 주둔했었다고도 전한다.
인조 2년(1624)에 남한산성을 고쳐 쌓을때 승려 벽암각성(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승병을 이끌고 활약했다. 자는 징원이며, 호는 스스로 벽암이라 지었다. 각성은 법명이다)을 팔도 도총섭《나라에서 내렸던 승려에 대한 직책 중 최고의 승직(僧職)》으로 삼고 전국의 승려들을 번갈아 징집하여 성을 쌓게 하였다.축성 후에도 승군을 주둔시켰는데 이들의 숙식을 위하여 인조16년(1638)에 건립한 절이다
병자호란의 차욕적인 항복을 한 장소이지만 정작 남한산성은 패배를 알지 못하는 곳이다.성의 외부는 급경사를 이루어 적의 접근이 어렵고,내부는 경사가 완만하여 젋은 경작지와 물을 갖춘 천혜의 전략적 요충지이기에,병자호란 당시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청군에 함락당하지 않고 47일이나 항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오랜기간 우여곡절을 가진 남한산성의 역사처럼 성곽형태는 단순하지 않아서 하나의 폐곡선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본성,봉암성,한봉성,신남성과 5개의 옹송으로 이루어진 복좁한 구조로 되어있다.인조4년(1626)에 중앙부에 가장 큰 폐곡선인 본성이 완성되었고,병자호란이후 방어력을 높이기 위하여 동쪽의 봉암성,한봉성 등을 비롯하여 여러차례 증축을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행궁은 한양도성을 임시로 대신할 용도로 조선 인조 4년 (1626)에 건립되었고 병자호란 때 아픈 역사를 품고 있으며, 일제 강점기 때 파괴되었다가 10여 년의 공사기간을 거쳐 현재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2007년 6월 8일 대한민국 사적 제480호로 지정되었다. 약 30,000㎡ 부지에 상궐, 하궐로 나뉘는데 정자, 좌전, 광주 유수의 집무사, 외행전, 임금의 처소인 내행전, 정문인 한남루 등이 있다. 행궁을 둘러보기 위해서는 행궁 매표소를 거쳐야 한다.
송암정은(松岩亭) 우리말의"솔바위 정저"라는 뜻이다.옛날 황진이가 금강산에서 수도를 하다 하산하여 이곳을 지나는데 남자 여럿이 기생들과 술을 마시고 있었다.그중 술에 취한 한사내가 황진이를 희롱하려 하자 황진이는 개의치 않고 오히려 불법을 설파하였다.이때 그 무리중 감명을 받은 기생 한 사람이 이 갑자기 절벽으로 떨어져 자결을 하였는데 그후 달 밝은 밤에는 이곳에서 노래소리와 통곡 소리가 들렸왔다고 한다.이바위에 서있는 고사목 (소나무)은 정조가 여주 능행길에 주필암에서 보고 벼슬을 내리며 옥관자를 붙여주라 하여 "대부송"이라고 부르는 소나무이다.송암정터는 세계문화유산 남한산성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 중 하나인 민속경관(누정)에 해당한다
남한산성에는 동,서,남,북 에 4개의 대문이 있는데,동문은 성의 남동쪽에 위치하며,남문과 함께 가장 많이 사용했던 성문이다. 조선 선조 때 보수하였고,인조2년(624)에 다시 건립하였으며, 정조3년(1779)성곽 개축시 함께 보수하였다. 이 때 성문마다 이름이 하나씩 붙여졌는데,동문은 좌익문(左翼門)이라 하였다. 행궁을 중심으로 국왕이 남쪽을 바라보며 국정을 살피니,동문이 좌측이 되므로 좌익문이라 한 것이다.이 동문은 낮은 지대에 축조되었기 때문에 계단을 쌓고 그위에 성문을 축조하여 우마차의 통행이 불가능하다.따라서 물자의 수송은 수구문 남쪽에 있는 11암문이 이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남한산성은 조선시대 뿐 아니라 삼국시대부터 천연의 요새로 중요한 역할을 하던 곳이다. 백제의 시조인 온조의 왕성이었다는 기록이 있고.나당전쟁이 한창이던 신라 문무왕 12년(672)에 한산주에 쌓은 주장성이라는 기록도 있다.고려시대에는 몽고의 침입을 격퇴한 곳이기도 하고 일제강점기엔 항일운동의 거점이 되기도 한 곳이다. 그러나 남한산성은 주로 병자호란으로 기억되는 곳이다.조선 인조14년(1636)에 청나라가 침략해오자 왕은 이곳으로 피신하여 항전하였으나,왕자들이 피신해 있던 강화도가 함락되고 패색이 짙어지자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조선 시대에 서울과 남한산성을 이어 주던 나루터로 현재 서울특별시 송파구 삼전동에 위치한다)에 나가 치욕적인 항복을 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성벽을 걸으면서 문화유적을 동시에 즐길 수 있다는 점이 남한산성의 장점으로 꼽힌다. 200여 개의 문화재가 산재해 있어 자연생태환경과 더불어 산성 내의 역사를 되새겨 볼 수 있는 곳 세계를 품은 남한산성 이야기 여기서 마침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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