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일:2019년6월09일 일요일
여행친구:나홀로
여행장소: 진주에나길과 진주성
진주 에나길 1코스
진주성 서장대에서 출발하여 비봉산, 선학산을 돌아 남가람문화거리를 돌아보는 15km의 에나길 1구간. 진주의 진산인 비봉산과 선학산에서 진주 도심의 한가운데로 흐르는 남강의 풍광과 도시 전체를 한눈에 감상할 수 있으며, 역사와 문화의 거리를 거닐면서 예술을 즐기고 휴식할 수 있는 구간이다.
내가 걸어온길
진주에나길 1코스는 걷기좋은 임도수준의 산길로 이여진다
"참" "진짜"라는 의미의 진주지역 사투리를 접목해 조성한 "진주 에나길"은 진주의 참 모습을 경험할수 있는곳이다.
진주의 사투리 말둥 "에나"하면 "진짜로"라는 뜻인걸 알았다
봉산사
진주강씨의 시조이자 고구려 병마도원수를 지낸 강이식 장군의 위패를 모신 사당임.
장군은 598년 임유관 전투에서 군사를 이끌고 수나라의 30만 대군을 물리치는 등 크게 활약한 고구려 장수이다.
"진주 에나길"은 수려한 남강 풍광과 천년고도를 느낄 수 있는 진짜 둘레길이다.
"진주 에나길" 역사문화생태 탐방로이다.
진주의 역사와 문화, 비봉산과 선학산을 아우르는 환경자원, 진주성과 남강 주변의 수변 자원을 연계하여 이색적이고 차별화된 쾌적한 도보여행을 즐길 수 있다.
비봉산 정상
정상에는 어떠한 표식도 없이 소나무가 정상석을 대신하고 있다
비봉산은 역사적으로 진주 읍치의 진산으로 지정되었으며, 풍수적으로는 봉황이 나는 듯한 형국을 하고 있어서 ‘비봉(飛鳳)’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진주의 진산(鎭山) 비봉산은 진주 8경 중의 하나로 복사꽃이 만발한 봄의 경치가 가장 아름다운 곳이며 진주 시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어 시민들에게는 고향처럼 느껴지는 산임. 원래 이름은 대봉산이며, 고려 시대 때 대성한 진양 강씨들과 연관된 이야기와 비봉산 가마못에 대한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비봉산을 지나자 넓은 임도는 체육시설과 약수터가 있는 산림휴양시설이 반겨준다
진주시 중심에 위치하며 시민의 삶과 함께 해 온 비봉산의 제모습을 찾기 위해 숲 가꾸기 사업에 착수한지 2년여 기간이 지나고 있는 지금,
비봉산은 과거 무분별한 산림훼손의 상처를 치유해 가면서 서서히 ‘시민 생명의 숲’으로 되살아나고 있다.
비봉산을 건강한 산림공원으로 되살리고, 시민 정서의 중심인 비봉산의 역사도 함께 회복시키고자 하는 여러 시민과 단체의 뜻을 모아 시작된 이 사업이,
지금은 진주의 미래 숲에서 한발짝 나아가 바람직한 도시 숲의 전국적인 모델로 재탄생해 나가고 있다
벚나무와 함께 걷는길이 시원하다.
벚꽃이 만개하면 이곳 역시 진주시민이 사랑하는 명소중 한곳이 되지 않을까.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 이런것일까~~??
자연그대로의 모습의 아름다움이야 더할나위 없지만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공간도 아름답다.
꽃과 나무들이 내 정원인듯하다.
혼자 걷는길에는 예쁜 그리움이 있고, 둘이걷는 길에는 어여쁜 사랑이 있고, 셋이걷는길에는 따듯한 우정이 있다고 했던가.
행복의 꽃길에서 나홀로 예쁜 그리움을 안고 진주에나길과 데이트를 즐긴다.
에나길 숲속을 걸어가는 모습이 아름답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걷다보면 어느길이든 행복하지 않는 길은 없다. 지금 내가 걷는이곳 진주에나길이 꽃길이다
진주시민들이 사랑하는 걷기 좋은길,진주 에나길, 힐링장소로서 부족함이 없다.
소망의돌
이돌에 양손을 얹고 소원을 빌면 소원이 이루어 진다고 한다.
나도 손을 얹고 소망을 빌어보자. 당장 빌어본다면 망막박리수술로 아직도 행동이 부자연스럽다 빨리 완쾌되길 빌어본다.
좌측이 가고자 하는 선학산 전망대(적색 화살표) , 동방호텔(흑색 화살표)
아름다운도시진주, 산위에서 내려다본 진주시는 아름답고 따듯하다, 보고 또봐도 아름다운 곳 진주시.
남강과 좌측 망진산
유유히 흐르는 남강 비단폭 되어 눈부시고 시내를 감싸안고 빙둘러앉은 산 비봉산과 선학산 이다.
가까운 곳에 이런 좋은 시민의 휴식처가 있다는것은 진주시민의 행복이 아니라 말할수 없다.도란도란 친구인듯한 분들이 웃음꽃피우며 이야기 하고 있다.
공기나쁘고 차많고 시끄러운 곳에서 생활하다 좋은 쉼터에서 맑은공기와 함께하면 온몸의 세포가 살아나서 꿈틀 댈것이다.
대봉정(大鳳亭)
진주의 진산인 비봉산의 옛 이름은 대봉산이었다.
대봉정은 대봉산의 정기를 잇는다는 뜻으로 정면으로 진주성과 천수교, 망진산을 바라보며 동측으로 월아산, 서측으로 지리산을 바라볼 수 있는 명당이다.
대봉정에서 바라본 남강과 진주성
대봉정에서 바라본 선학산 전망대(좌측 화살표)
키큰 소나무는 시원한 그늘막을 쳐 놓은 숲길을 만들고 시원한 바람은 살랑살랑 일렁이며 온몸을 감싸주며 땀을 훔쳐 내준다.
전주시민의 휴식쳐 답게 등산로도 잘 정비 되여져 있고 쉴 장소도 곳곳에 설치되여져 있어 힐링하기에는 제격인 장소이다
지나가시는 분에게 사진 촬영부탁을 하니 어디서 왔냐고 물으시기에 서울에서 볼일차 들렸다고 하니
비봉산과 선학산의 등산로는 전국 어느 등산로에 견줘도 뒤지지 않는 최고의 코스라고 진주시민이 말씀하신다, 천천히 즐기며 걷기에는 안성맟춤이다.
봉황교
말티고개에 위치한 봉황교는 선학산과 비봉산을 잇는 보행 교량으로 봉황의 모습을 한 점이 특징이다
봉황교는 공원처럼 잘 꾸며져 있다. 봉황교 공원에는 화장실도 있는데 깨끗하게 관리되어 있다.
봉황교가 있는 공원에서 잠시 숨을 돌리며 혹시 도시락을 준비해갔다면 먹어도 좋겠다. 시내쪽 진주를 조망하기에 아주 적합하다.
선학산(仙鶴山) 전망대에서
선학산은 135.5m 고도의 낮은 산으로 길이 완만해 오르기 편한 곳이다. 정상 바로 아래에는 남강과 진주 시내가 한눈에 보여 전망이 좋고, 시가지와 접근성이 좋아 이곳 주민들의 문화공간으로 자리 잡은 곳이다. 선학산 전망대는 산 정상에 124.21㎡ 규모의 2층 건물로 지어졌으며, 1층에는 화장실 및 휴게실이 있고 2층에는 전망데크가 들어서 있다. 특히 이곳은 진주시만의 아름다운 일출을 보기 좋은 장소로 유명해 많은 관광객이 찾는 명소로 자리매김했다
선학산 전망대 에나길 1구간안내판
진주성과 남강변, 비봉산과 선학산을 연계하는 문화생태탐방로인 '진주 에나길'
진주에 깃든 논개의 충절과 유유히 흐르는 남강의 정취를 느껴보자.
진주혁신도시 뒤로 산림청 선정 100대명산중 한곳인 연화산이 희미하게 조망된다.
연화산은 2013년4월21일 100대명산 산행중 다녀온곳이기도 하다,
지금은 완등 하였지만 100대명산 완등하기 위해 이곳저곳 다녔던 그시절이 그립다.
아래부분 위만 찍힌 건물이 동방호텔이고 유유히 흐르는 남강위로 진주교와 오른쪽으로 진주성 그뒤로는 천수교가 진주의 아름다움을 대신하고 있다.
선학산 전망대에서 밤꽃 향기 맡으며 동방호텔로 하산한다.
동방호텔과 남강건너편 경남문화예술회관이 조망된다.
선학산 송원사
선학산 전망대에서 하산하여 국궁의요람 람덕정과 송원사를거쳐 동방호텔을 끼고 남강으로 향해서 진주성으로 향한다.
뒤벼리
선학산 전망대에서 하산하자 진주8경의하나인 뒤벼리가 반겨준다(남강 좌측)
뒤벼리의 벼리는 벼랑 즉 낭떠러지를 말한다. 뒤에 있는 벼랑이라는 뜻이다
높이 수십 척에 이르는 절벽이 짙은 남강의 물빛을 받아 한 폭의 그림을 이루고 있으며 건너편 경남문화예술회관 주변의 잘 정비된 조경과 자연미와 인공미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병풍을 두른 듯 깎아지른 절벽이 강줄기를 따라가며 절정을 이루어 남강의 오묘한 풍치를 감상하기에 더 없이 훌륭한 장소이며 진주를 찾는 풍류객이나 관광객은 반드시 찾게 되는, 진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진주 8경 중의 하나이다.
경남 진주시 강남로 215(칠암동)에 위치한 도립 종합 공연장이다.
진주시 소속 예술단들인 진주 시립 전통예술단과 진주 시립 합창단, 진주 시립 소년소녀 합창단, 진주 시립 교향악단이 입주해 있다.
진주교와 진주성내의 촉석루가 반겨준다.
파란하늘과 파란강이 눈의 피로를 말끔이 씻어준다.. 도심 한가운데로 흐르는 남강의 풍광과 도시 전체를 한눈에 감상할 수 있다.
진주 남강(南江)
진주는 도심의 한 복판을 가로질러 흐르는 남강(南江)이 빚은 천혜의 풍광으로 예로부터 시인묵객(詩人墨客)의 발길이 끊이지 않은 멋과 풍류의 고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일찍이 교방문화(敎坊文化)가 꽃 피웠던 곳으로 예로부터“북 평양, 남 진주’라고 했다.
진주교 다리밑을 지나며 바라본 진주성
남강 변 절벽 위에 세워진 진주성은 본래 토성이던 것을 고려 말 우왕 5년(1379년)에 석성으로 개축하여 오늘에 이른 진주의 역사와 문화를 대표하는
사적지이며 관광지임.김시민 장군이 임진왜란 때 2만여 왜군을 물리친 곳으로 임진왜란 3대 첩지의 하나로 유명하며 다양한 유물과유적이 성내에 있음.
진주교(晋州橋)
진주교는 중앙동과 칠암동을 연결하는 진주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교통량이 많은 다리이다.
칠암동 방면에서 진주교를 건너오면 진주시내 중심부와 촉석루가 있는 진주공원과 진주시외버스터미널이 있고, 각종 중심업무 기능들이 집중되어 있다.
진주교에는 논개를 기리는 뜻으로 교각 밑을 감싼 거대한 황동반지가 은은히 빛나고 있어 충절의 고장 진주를 상징하는 다리가 되고 있다
진주성(晋州城)
진주를 대표하는 명승지. 진주성(晋州城)은 남성동과 본성동에 위치하며, 촉석성(矗石城) 혹은 진양성(晋陽城)으로도 불린다. 조선시대 진주성의 내성과 그 주변 지역 176,804㎡로,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18호로 지정되었다.
진주성(晋州城)은 삼국시대에는 거열성, 통일신라시대에는 만흥산성, 고려시대에는 촉석성, 조선시대 이래로는 진주성 또는 진양성(晋陽城)으로도 불렸다. 현재 성내에는 국립진주박물관 · 진주성 임진대첩 계사 순의단 · 의기사 · 창렬사 · 호국사 등의 시설과 유적이 있다.
국립진주 박물관(國立晉州博物館)
국립진주박물관은 1984년11월2일 "가야문화연구의 중심기관"을 표방하며 문을 열었다.
1998년에는 임진왜란 박물관으로 특성화 하였고 2008,2018년 두 차례 전시개편 작업을거쳐 지금의모습으로 재단장하엿다.
임진왜란과 관련된 동아시아 사회의역사. 경남의 역사와 문화를 종합적으로 연구.전시. 교육하고 있다
진주에 개인 일로 두번 와본 경험은 있지만 시간상 들리지 못하고 돌아가곤 했는데 오늘은 시간을 내서 진주성에 들렸다
진주 하면 금방 떠오르는 것이 남강과 촉석루다. 촉석루에 와본 적이 있건 없건 간에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뛰어든 논개 덕분에 촉석루는 쉽게 잊히지 않을 명성을 얻었다. 그 촉석루가 진주성 안에 들어앉아 있다. 진주성은 최근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국내 관광지’ 1위로 선정되기도 한 명소다.
촉석루(矗石樓)
촉석루는 진주의 상징이자 영남 제일의 명승이다. 남강 바위 벼랑 위에 자리한 탓에 뛰어난 경치까지 볼 수 있는 촉석루는 전시에는 장졸을 지휘하던 지휘소로,
평시에는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는 곳으로 또 때로는 과거를 치르는 고시장으로 쓰였다.
지금의 촉석루는 한국 전쟁 때 불탄 것을 진주 고적 보존회가 시민의 성금으로 1960년에 중건한 것이다
촉석루(矗石樓)
하륜이 지은 「촉석루기(矗石樓記)」에 의하면 남강 가에 뾰족뾰족한 돌들이 솟아 있는 까닭에 그 모습을 따서 누각의 이름을 촉석루라고 지었다고 하나,
다른 일설에 의하면 촉석산에서 돌을 캐다가 누각을 지었으므로 촉석루라고 하였다고도 한다
촉석루 내부현판 남장대(南將臺)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8호. 정면 5칸, 측면 4칸. 남강(南江)의 바위 벼랑 위에 장엄하게 자리잡고 있어 영남(嶺南) 제일의 아름다운 누각이다.
1241년(고종 28)에 창건하여 7차례의 중건과 보수를 거쳤으며, 1365년(공민왕 14)에 창건하였다는 설도 있다. 진주성의 남장대(南將臺)로서 장원루(壯元樓)라고도 하였다. 전쟁이 일어나면 진주성을 지키는 지휘본부였고, 평화로운 시절에는 과거를 치르는 고시장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1725년(영조 1) 목사 안극효(安克孝)에 의하여 마지막으로 중수되었고, 현재의 건물은 6·25전쟁 때 불타 없어진 것을 1960년에 재건하였다
축석루 아래 남강 에서는 풍류를 즐기는듯 한척의 배가 유유히 흐르고 있다.(윗그림:진주교, 아랫그림:천수교 방면)
의기사(義妓祠)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7호,논개의 넑을 기리는 사당
임진왜란 당시(1593년) 진주성이 함락되자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껴안고 남강에 투신하여 순절한 논개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사당으로 내부에는 논개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영조 16년(1740년)에 경상우 병사 남덕하의 건의가 받아들여져 건립되었으며, 지금의 의가사는 의기 창렬회가 시민의 성금을 모아 재건한 것이다.
논개의 영정
논개는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최경회의 후처였는데, 최경회가 제2차 진주성 전투에 임할 때 성안에서 전투 뒷수발을 들었다.
진주성이 함락되고 최경회가 남강에 투신하자, 논개는 일본 장수들이 촉석루에서 잔치를 벌이고 있을 때
일본군 장수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유인해 끌어안고 함께 남강에 투신했다.
1739년 논개를 추모하는 사당 ‘의기사’가 세워지고, 논개는 ‘의기’로 추모받게 되었다.
특이한점은 논개가 끼고 있는 양손의 손가락 반지이다. 엄지가 보이지않아 5개인지는 잘 모르지만 양손의 반지가 특이해 눈에 들어온다
파란하늘과 함께 석류꽃도 아름답게 물들어간다.전주시를 상징하는 꽃 과나무 석류
9월~10월에는 석류가 익어서 결실을 맺으리라
진주 의암사적비(晉州 義巖事蹟碑)
의암사적비는 선조 26년(1593) 6월 29일, 임진왜란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성이 함락되고, 7만 민관군이 순절하자 나라의 원수를 갚기 위해 왜장을 끌어안고
순국한 논개의 사적을 기록한 비석이다.
진주의 사민(士民)들은 명암 정식(明庵 鄭拭:1683∼1746)이 지은 비문으로 경종 2년(1722)에 세웠다. 영조 16년(1740) 병사 남덕하(南德夏:1688∼1742)는 의기정포(義妓旌褒)를 계청하여 의기사를 창건하였고, 「의암사적비」에는 비각을 건립하여 의기논개지문(義妓論介之門)이라는 현판을 게시하였다.
이 비는 아래의 의암(義巖, 경상남도 기념물 제235호)과 마주하고 있어 의기 논개의 순국정신을 한층 더 흠모케 하고 있다.
이 비의 비문에는 “그 바위 홀로 섰고, 그 여인 우뚝 섰네. 여인은 이 바위가 아닌들 어찌 죽을 곳을 찾았고, 바위는 이 여인이 아닌들 어찌 의로운 소리 들으랴. 남강의 높은 바위, 꽃다운 그 이름 만고에 전해지리”라는 시가 새겨져 있다.
의암(義巖
진주성 촉석루 아래 남강변 강가 수면 위로 솟아올라 있는 바위가 있다. 바위는 가로 3.65m, 세로 3.3m의 윗면이 평평한 모양을 하고 있으며,
1629년 진주의 선비 정대륭은 바위의 서쪽 벽면에 ‘의암(義巖)’이라는 글자를 새겼고, 남쪽에는 한몽삼이 역시 ‘의암’이라는 글자를 새겼다.
옆의 암벽에는 ‘한 줄기 긴 강이 띠를 두르고, 의열은 천 년의 세월을 흐르리라[일대장강(一帶長江) 천추의열(千秋義烈)]’는 내용의 글이 새겨져 있다.
1593년 6월 29일,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성이 일본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논개(論介)는 성을 점령한 일본군이 승리의 기쁨에 들떠 있을 때 일본군 장수를 이곳으로 유인한 후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했다. 이러한 논개의 순국정신을 현창하기 위해 영남사람들은 이 바위를 ‘의암’이라고 불렀다
논개가 순절한 바위 의암은 2001년 9월 27일 경상남도 기념물 제235호로 지정되었다.
진주대첩광장 조성공사 현장
2007년착공해서 2022년 완공 목표로 진행중이다.현재는 문화재 발굴 조사중이란다(현수막)
진주대첩기념광장은 진주성 촉석문 앞 본성동 일대 2만 5020㎡ 부지에 총사업비 980억원을 투입해 기념광장, 주차장, 기념관 등을 조성하는 사업이다.
진주만의 상징성, 기념성, 예술성을 표현함과 동시에 비움의 광장으로 조성함으로써 새로운 활력의 가치를 부여하는
진주의 새로운 천년의 미래를 열어가는 시민의 열린 광장으로 조성한다는 복안이다.
진주성 호국종각(護國 鐘閣)
진주시가 진주성 호국 정신을 기리기 위해 문화재 육성 기금으로 1980년에 제작한 범종으로 종신에는 각종 문양이 부조되어 있고
이은상 시조 시인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종신은 2.7m, 지름은 1.7m이다.
좌(左)김시민 장군 전공비(金時敏將軍戰功碑) 우(右)촉 석 정 충 단 비 (矗石旌忠檀碑)
김시민 장군 전공비(金時敏將軍戰功碑)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 대첩에서 6일간의 혈투 끝에 왜군을 격퇴하고 순절한 충무공 김시민 장군의 전공을 새긴 비석이다. 김시민 장군은 왜군이 진주성을 포위하자 성 안에 있는 노인과 부녀자에게 남장을 하게 해 적에게 군사의 위용을 보이게 하는 등 뛰어난 전술을 펼쳤다.
김시민 장군 전공비는 1972년 2월 12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었다.
촉석정충단비(矗石旌忠檀碑)
숙종 12년(1686년)에 세워진 비로 임진왜란 당시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장렬하게 순국한 삼장사 김천일, 황진, 최경회와
삼장사를 중심으로 뭉친 7만 민 · 관 · 군의 충의가 새겨져 있다.
이밖에도 순국한 충청병사 황진(黃進)과 사천현감 장윤(張潤) 등의 인물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는데, 임진왜란의 전적과 진주성싸움을 이해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임진왜란과 진주성 전투(壬辰倭亂-晋州城戰鬪)
조선시대에 일어난 임진왜란 때 진주성전투는 두 차례 있었다. 임진년(1592년, 선조 25년) 10월(이하 음력)의 전투를 제1차진주성전투라 하고, 이듬해 계사년(1593년) 6월의 전투를 제2차진주성전투라 부른다. 제1차진주성전투는 곧 진주대첩으로서 임진왜란 3대첩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반면, 제2차진주성전투는 성이 함락됨과 동시에 대학살의 참극을 빚은 전투로 기록된다. 진주성은 소수의 병력으로 적의 대군을 물리친 빛나는 승리의 표상(임진승첩, 壬辰勝捷)인 동시에,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처절히 항전하다 끝내 순국한 충의의 제단(계사순의, 癸巳殉義)으로 우리 역사 속에 아로새겨져 있다.
조선시대 대형 총통
진주성 내부 세 곳에 조선시대 대형총통이 전시되어 있다. 지금으로 치면 곡사포 정도의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될 듯하다.
천자(天字)총통 ,지자(地字)총통, 현자(玄字)총통 세가지가 전시 되여져 있다.
천자문의 순서에 따라(지금의 가,나,다 순) 하늘천이 첫번째요,따지가 두번째, 검을현이 세번째 포탄이 날아가는거리에 따라 이름이 메겨진것 같다.
진주성 임진대첩 계사순의단( 晋州城壬辰大捷癸巳殉義壇)
임진왜란 진주성 1차 전투(1592년 10월)에서 진주목사 김시민을 비롯한 아군 3,000여 명이 왜군 2만여 명을 맞아 치열한 전투 끝에 적을 물리쳤다. 이듬해인 1593년 6월 진주성 제2차 전투 때에는 창의사 김천일,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최경회, 충청도병마절도사 황진 등의 민·관·군 7만여 명이 진주성을 공격해 온 왜군 10만여 명을 맞아 10여 일 간의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그 과정에서 순의(殉義)한 충혼을 위령하기 위하여 1987년 문화재 관리국에서 건립하였다.
진주성은 삶과 가깝다. 일상의 공간에서 걸어서 쉽게 닿을 수 있고, 시민들의 휴식처로, 때로는 축제의 현장으로 이방인을 반긴다
삶터 가까운 곳에 역사와 풍경과 문화가 깃든 성곽이 존재한다는 것은 큰 행운이다.
쌍충사적비 (雙忠事跡碑)
비의 높이 4m, 너비 103㎝, 두께 28㎝.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호.
이 비는 임진왜란 때 전공을 크게 세운 성주목사(星州牧使) 제말(諸沫) 장군과 이순신(李舜臣)을 도와 큰 공을 세운 제홍록(諸弘祿) 장군의 충의를 기록한 사적비이다.
일명 ‘제씨(諸氏) 쌍충비(雙忠碑)’로 불리우는 이 비는 본래 진주성 안 촉석루 옆에 있었으나 일본관헌들에 의해 비각이 헐리고 비가 방치되었던 것을
1961년 지금 자리에 다시 옮기고 비각을 새로 지었다.
진주성 우물(晋州城 水井)
이우물은 진주성 내 우물 복원을 위한 발굴 조사에서 확인된 우물로서 2013년 9월에 복원되었다
우물의 너비는1.5m쯤이고 깊이는 8.4m인데더러운 물이 들어가지 못하게 둥근 모양의 둘레돌을 주변에 놓았다.
조선후기 진주성도에는 지금 위치에관청과 함께 세 곳에우물 표시가 있는것으로보아 진주성을 쌓은 삼국시대부터있었던 우물로,
임진왜란진주성 전투 때에는 식수공급원으로중요한 역활을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하늘높이 청량감이 쭉쭉 올라가 있다,진주성의 많은 볼거리와 넉넉한 잔듸와 숲이 좋다.
발길닿는곳마다 역사가 숨쉬고 수려한 경관이 유혹하며 시선을 멈추게 한다
진주성 공북문(晋州城拱北門)
공북문(拱北門)이라는 명칭에 대해 살펴보면, ‘공(拱)’은 두 손을 맞잡아 가슴까지 올려 절한다는 뜻이고, ‘북(北)’은 북쪽이라는 방향을 가리키는 것으로 즉, 남면한 임금을 올려다보는 방향이 된다. 『고려사』에 ‘공립(拱立)’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공경을 표하기 위하여 두 손을 마주 잡고 서 있다’라는 뜻이다. 즉, ‘공북’이란 ‘충성을 맹세한 신하가 임금이 계시는 북쪽을 향하여 공손하게 절을 올리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충무공 김시민 장군 동상 (忠武公 金時敏 將軍 銅像 )
임진왜란 당시 순절한 충무공 김시민 장군의 호국 충절 정신을 계승하기 위하여 건립한 높이 7m의 진주성 수호상으로 2000년 1월 1일 제막하였다.
김시민장군은 1554년(명종 9년, 甲寅年) 음력 8월 27일(양력 9월 23일)에 충청도 목천현백전촌(木川縣 栢田村) 지금의 충남 천안시 병천면 가전리 백전부락에서 父 김충갑(金忠甲)공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김충갑의 자는 서초(恕初)요 호는 구암(龜岩)이며 고려충신 충렬공 김방경(金方慶)장군의 12세손이다.
김시민 장군의 본관은 안동, 자는 면오(勉吾),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진주성은예나 지금이나 빼어난 풍광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연인이나, 가족,친구들과의 데이트 장소로서 최고라고 말할수있다
한여름에도 더위를 못 느낄 만큼 시원한 강바람이 불어와 지친 몸을 어루만져주고 탁 트인 풍경이 마음까지 편안하게 해준다.
미국 CNN이 선정한 ‘한국 방문 시 꼭 가봐야 할 곳 50선’에 뽑히기도 했다
영남 포정사(嶺南 布政司)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호
조선시대 때 경상남도관찰사가 업무를 처리하였던 관아영남포정사의 정문.
조선 광해군 10년(1618) 병사를 지내던 남이흥이 내성의 동쪽문을 고쳐 세우고 옆에 대변루(待變樓)를 새로 지었는데, 이것이 망미루의 본래 건물이다.
후에 1895년(고종 32)에 전국 8도제가 폐지되고 23부제로 시행됨에 따라 진주부가 설치되면서 진주관찰부의 선화당 관문이 되었다.
1896년에 전국을 13도로 개편하자 망미루가 경상남도관찰사의 정문이 되어 영남포정사라고 이름을 붙였다.
진주성 비석군(碑石群 )
선조 37년(1604년) 마산에 있던 경상도 우병영을 진주성으로 롬긴 병사 겸 목사 이수일의 유애비와 효종 10년(1656년) 목사 성이성의 청덕 유애비 등
조선 시대에 세워진 30여 기의 비석군이다. 진주성을 비롯한 시내 각처에 방치된 채로 산재해 있던 것을
한국 문화재 보존 협회 진주시 지부에서 비석들을 보호할 목적으로지금 위치에 옮겨 놓았다
진주성 경절사(擎節祠)
고려시대 하공진 장군을 모신 경절사, 내부는 관람불가
경절사는 고려시대 1010년 강조의 변을 대의명분으로 침입해온 거란의 제2차침입때 협상단을 자처해 스스로 볼모가 됨으로써연경에서 죽어간 충절의 화신 하공진 장군을 기리는 사당이자, 하공진 장군이 태어난 곳이다. 거란의 제2차 침입을 실질적으로 종식시킨 당사자이지만, 제1차 침입 때 알려진 서희 와 제3차 거란의 침입 때귀주대첩을 통해 알려진강감찬 장군에 비해 조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인물이다. 바로 왼쪽 편으로는 청계서원이 있다.
청계서원(淸溪書院)
정천익을 배향한 청계서원,봉남서당이라고도 부른다,이곳도 경절사와 마찬가지로 내부는 관람불가이다
청계서원은 고려시대 문익점의 장인인 문충공 정천익을 모신 서원이다. 1363년 고려 시대 원나라에서 목화를 숨겨 들여온 문익점은 장인 정천익에게 배양과 재배를 부탁하고, 정천익은 3년간 연구 끝에 재배에 성공한다. 이어 면화를 가공하는 물레를 고안하여 보급한 공으로 문충공의 시호를 받고, 진양군(晋陽君)에 봉해졌다.
청계서원은 그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서원이다. 바로 오른쪽 편으로는 경절사가 있고, 뒷편으로는 북장대가 보인다.
청계서원 앞에서
경상도 지역에 건립된 193개의 서원 중 경상남도 지역은 19개 군에 44개 서원이 건립되었는데, 그 가운데 진주지역에 해당되는 서원은 7개로 경상남도에서 가장 많다.
재실의 수에 있어서도 진주지역에 약 500여개가 분포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현재도 문중에 따라 새로 건립하고 있는 실정이다.
서원은 선현을 모시는‘사(祠)’와 제자를 교육하는‘재(齋)’에서 출발하며, 훗날 이들의 기능이 합쳐져 서원이 되었다
진주성 북장대(晋州城 北將臺)
진주성 북문의 지휘장대로 임진왜란 때 군 지휘소로 사용되었으며, 그 당시 소실된 것을 1618년 광해군 10년에 병사(兵使) 남이흥(南以興)이 중건한 건물이다.
그 후 여러 번의 중수(重修)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고, 현재의 건물은 1964년에 중수한 것이다. 내성 북쪽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서,
성내와 성외의 포진까지 살피며 지휘할 수 있었던 곳으로 편액은 진남루(鎭南樓)라고 되어 있다.
진주성은 고려 말까지는 토성이었으나, 고려 말과 조선 초에 석성으로 수축되었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병사김수와 이수일이 성을 증축하면서 내성과 외성으로 나뉘게 되었고,광해군 때 남이홍이 성을 증축하면서 11개의 포루를 설치하게 되었다. 내성과 외성으로 나뉘어져 있던진주성은 한일합방 이후 원형이 훼손되어 내외성의 구분이 사라졌으며, 1983년에 복원정비를 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남아 있게 된 것이다
진주성 사랑나무(연리지, 연리목)
뿌리가 다른 나뭇가지들이 서로 엉켜 마치 한 나무처럼 자라는 것으로, 원래는 효성이 지극함을 나타냈으나
현재는 남녀 간의 사랑 혹은 짙은 부부애를 비유하는 말이 되었다.
진주성 포루(砲樓)
진주성을 방어하던 포진지이다.
선조 40년(1607년)에 병사 김태허에 의해 진주성 내 · 외성에 포루 12좌가 설치되었는데 1969년 진주성을 복원하면서 상징적으로 1개소만 복원하였다.
남강 천수교 뒤로 망진산(望鎭山)이 보인다.
망진산(望鎭山/望晉山) 고려 때 어느 충신이 역적으로 몰려 귀양 오게 되자 나라를 걱정하며 이 산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았다고 하여 망경산(望京山)이라고도 한다.
선학산 전망대와 함께 진주 시내를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장소로 유명하다. 또한, 이곳에서보는 시내 야경은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아름답다.
삼일 독립운동 기념비((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1971년 7월 1일 3·1운동 52주년을 맞아 독립운동에 참여한 선열들의 의거를 기리기 위하여 진주시민들의 뜻을 모아 세운 기념비이다.
1919년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에 의하여 독립선언이 있은 후, 거족적인 민족운동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일어났다.
이에 진주에서는 3월 18일부터 5월까지 대소 20여 회의 시위에 3만여 명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3월 18일 시위를 주도했던 박진환(朴進煥), 이강우(李康雨), 이창대(李昌大), 강상호(姜相鎬), 박용근(朴龍根) 등을 포함한 22인을 기리기 위한 비이다.
진주지구 전승비(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한국전쟁 당시 진주지구 내 북한군을 격퇴시킨 전승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
1950년 7월 29일 미 제25사단 ‘칸’ 기동부대가 진주지구에 쳐들어온 북한군 제6사단과 제9사단 병력을 격퇴시킨 전승을 기리기 위해
1958년(단기 4291년) 7월 10일 육군 제1206 건설공병단에서 건립하였다.
개천예술제
전주시 일원에서 펼쳐지는 개천 예술제는 매년10월3일~10월10일까지 열린다.
우리나라 지방종합예술제의 효시로 국내최고,최대의 종합 문화예술축제 이다.1949년 "영남 예술제"로 시작하여
1959년 부터 그명칭을 "개천 예술제"로 바꾸어 오늘에 이르렀다.
진주성 어느곳이든 아름다운 포토죤을 이룬다.
석류사이로 아름다운 촉석루가 발길을 사로 잡는다,
국립진주박물관 야외공연장
국립진주박물관 야외공연장은 우리 전통 방식의 화계 형식을 빌려 계단으로 관람석을 만들었지만 일본에서 들여온 꽝광나무로 심어져 있다.
성화 안치대
제24회 88서울 올림픽 의 성공적 개최를 기원하는 전국 성화봉송행사기간중 진주시 방문때 성화 안치를 위해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에서 설치하여 기증한 시설물로서
현재에는 매년 개최되는 개천 예술재 행사중 성화 안치대로 활용하고 있다,
진주 국립 박물관
1980년 10월 기공식을 가진 뒤 1984년 11월 일곱 번째의 국립 박물관으로 개관하였다.
진주는 임진왜란의 최대 격전지인 진주성 전투가 있었던 곳으로 촉석루·쌍충사적비 등 많은 임진왜란 유적들이 남아 있다.
이러한 유적과 유물들의 과학적인 보존과 전시의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1996년부터 본격적인 전시 체제를 개편하여 1998년 1월 15일 기존의 가야 문화 위주의 박물관에서 임진왜란 전문 역사박물관으로 재개관하였다.
▼진주국립 박물관 내부▼
임진왜란실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면서 시작된 임진왜란은 명군이 참전하면서 동아시아 대전이 되었다.
임진왜란실은 모두 보물로 지정된 천자·지자·현자·황자총통 및 완구를 비롯한 임진왜란 관련 각종 무기를 중국과 일본의 무기와 함께 소개한다.
아울러 임진왜란 관련 다양한 주제와 전쟁 이후 동아시아 사회의 재편과 문화교류도 살펴볼 수 있다
역사 문화홀
역사문화홀은 우리 문화재의 아름다움을 편안히 느껴보는 문화휴식공간이다.
도기바퀴장식뿔잔(보물 제637호), 청자상감매죽학문매병(보물 제1168호)등 신석기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화재와 각종 역사 도서,
휴식의 공간을 복합 구성하였다.
남강 음악분수대
진주의 역사와 남강의 수려한 경관이 이루는 남강둔치에 설치된 음악분수대.
야간 가동시에는 아름다운 음악선율에 맟춰 춤을 추고 있는 듯 천년도시 진주의 밤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 준다.
음악분수의 연출방식은 음의 고저에 따라 입력되어 있는 값이 나오는 단순한 음악 분수가 아닌 음악에 맞추어 수동으로 분수 모양을 조합하여 조명과 각종 효과들을 연출함으로써 연출가의 뛰어난 음악에 대한 해석과 예술성이 요구되는 종합창작 예술품이다
서장대 (西將臺)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6호, 장군의 지휘소
진주성의 서문에 속하는 장군의 지휘소이다. 〈여지도서〉에 보면 '회룡루'로 기록되어 있는데 규모는 작았으나 촉석루와 같이 다락집이었다고 한다.
지금의 건물은 1934년에 독지가 서상필 씨가 중건한 것이다. 현재 걸려 있는 현판의 글씨는 서예가 은초 정명수 선생의 글씨이다.
▼호국사▼
호국사 (護國寺)
전통 사찰 제70호, 승병들의 넋을 기리는 곳
고려 시대에 창건된 절로, 원래 이름은 내성사였으며 임진왜란 때는 승군의 근거지가 되었다. 제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순국한 승병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숙종 때 호국사란 이름으로 재건되었다. 현재의 호국사는 진주성을 복원하면서 일주문 자리가 발견되어 새로 건립된 것이며, 사찰의 건물들은 모두 근년에 새로 지어졌다.
창렬사( 彰烈祠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호
창열사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호로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한 것을 기리기 위해 진주성 내에 건립되어 있다. 제2차 전투에서 많은 진주 성민이 순국한 후 경상도 관찰사 정사호가 건립하였고, 선조 40년에 사액을 받았다. 후에 1868년(고종5년)흥선대원군의서원철폐령으로김시민 장군을 모신 충민사가 철폐되자, 이곳에 모시게 된다.
진주성 서문
서문을 나서면서 진주성 관람도 끝이난다
진주성 서문매표소로 나오면서 진주 에나길과 진주성 여행기 여기서 마침니다.
저의 블로그 방문에 감사의 말씀전함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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