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일:2018년7월17일 화요일
서동공원(궁남지)
묺화재 지정:사적 제135호
건립시기:백제 무왕 34년(634)
소재지: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117번지 일대
궁남지 사거리에는 서동과 선화공주의 조형물이 맟이하고 있다.
신라 제26대 왕인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는 절세미인이었다. 훗날 백제의 30대 왕이 되는 무왕(武王), 서동은 어린 시절 공주를 연모하여 선화공주가 실은 밤마다 남몰래 서동의 방으로 찾아가 만난다는 내용의 노래 〈서동요(薯童謠)〉를 신라에 퍼뜨렸다. 이 노래는 곧 진평왕의 귀에까지 들어가 공주는 행실이 정숙하지 못하다며 귀양을 가게 되었다. 미리 대기하던 서동은 선화공주에게 막대한 황금을 보냈고, 공주는 신라 왕궁에 이를 보내 진평왕의 노여움을 풀고 둘의 혼인을 인정받으려 했다. 여기까지가 흔히 말하는 서동과 선화공주에 대한 설화이다
" 서동요"
성년이 된 서동은 왕의 밀명을 받고 서라벌 정탐을 위해 신라에 잠입했다가 미모의 선화공주에게 반한다.
서동이 적국의 공주를 손에 넣기 위해 아이들에게 부르게 했던 노래가 바로 향가 서동요다.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시집가서, 밤마다 몰래 서동과 만난대요”
라는 노래를 얘들에게 부르게하여 소문을 내어 선화공주의 아버지인 신라 28대 진평왕의 눈에 벗어나 쫗겨나
서동과 혼인하게 되었다는 설화가 있다.후에 서동은 백제의 30대 무왕으로 오르게 된다.
옛날이야 이설화가 낭만적으로 들릴수 있겠으나 요즈음시대에 이런일이 있었다면
아마도 큰범죄행위에 해당되지않았을까.유언비어에 혼인빙자 사기죄???
유언비어는 확실한데 혼인빙자사기죄는 법률가가 아니어서 ㅎ ㅎ
무왕은 삼국유사에 실려있는 사랑 이야기, 서동요 설화의 주인공이다..
얼마전 전북 익산의 대왕릉과 소왕릉이 나란히 자리 잡아 얻은 이름 쌍릉.
그 쌍릉에서 발견된 뼈가 백제 무왕의 것일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 결과가 나왔다고한다.
부여와 익산 거리가 제법떨어진곳인데 거기에 백제 무와의 무덤이 잇다니 조금은 의아하다.
왕비의 무덤으로 알려진 소왕릉도 내년부터 발굴되는데, 선화공주의 흔적도 발견될지 관심을 모은다고 한다.
삼국유사 속 서동과 그의 부인이 14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함께 모습을 드러낼 가능성도 커졌다고한다.
부여 서동연꽃축제 행사장 안내도
제16회 부여서동연꽃축제가 개막했다.
2018.07.06(금) ~ 2018.07.15(일) 15일까지 부여 서동공원(궁남지) 일원에서 진행되였다.
'세계를 품은 궁남지, 밤에도 빛나다!'라는 주제로 한 올해 연꽃축제,
연꽃이 국화인 7개국 대표단, 국내외 자매결연도시 대표단, 군민 등 4,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서문주차장 주무대에서 화려하게 열렸다고한다.
내가 여행한 시기는 축제 기간이 끝난후 여행했다
연꽃을 보러 양수리 세미원을 갈까하다 연꽃축제검색을하다보니 부여 궁남지에 연꽃 축제가 있다는 소식를 접하게 된다.
부여~~언젠가는 가보고 싶었던곳 인데 잘됐다 싶어 애마를몰고 부여로 달린다.
동문주차장에 주차시킨다.
연꽃 축제도 끝났고 평일인데도 많은 관람객들이 참여하고 있다.
부여 궁남지 연꽃축제는 문화체육관광부 선정 2015~2018 4년 연속 우수축제로 세계유산 도시이자 백제역사의 중심 부여에서 펼쳐지며
10만평 연지에 피어난 천만송이 연꽃 부여의 여름이 가장 빛나는 순간이며 2000년을 견뎌 낸 오가하스연과 연꽃이 국화인 7개 나라가 함께했다.
부여 궁남지에 천만송이 연꽃 향연
한 여름, 수면 위로 피는 연꽃은 매우 크고 아름다워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다.
특히 연꽃은 진흙 속에서 뿌리를 내리고 깨끗하고 밝은 꽃을 피운다 하여 불자들이 선호하는 꽃이다.
연꽃축제를 하는 곳으로 여러곳이 있지만 집에서 가장 가까운 다녀온곳 양수리세미원이 생각나고 ,
다음에는 불친님들의 포스팅으로 부터 접하게된, 시흥관곡지연축제, 무안백연제, 김제홍연축제 그리고 어늘 여행한곳 부여 서동공원 궁남지가 생각난다.
서동공원(궁남지)연꽃 축제는2018년은 6일부터 15일까지 열흘동안 이어지고
이번 축제에서는 낮에는 연꽃을 감상하고,
밤에는 궁남지 포룡정을 중심으로 대형 수상연꽃과 LED 무빙조명, 연꽃유등이 펼쳐내는 빛의 향연을 즐길 수 있다고 하는데~~
시간상 낯에만 여행하고 돌아 왔다
남지는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정원으로, 선화공주와 서동의 전설이 담긴 곳이다.
이곳에 가시연꽃, 빅토리아연꽃 등 약 50여 종의 연꽃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축제 기간 궁남지에 조명이 설치돼 화려한 볼거리를 선사한다.
내가여행할시기는 이미 축제기간은 지났고 연꽃도 질부렵이지만
연꽃의 그리움으로 평일이지만 많은 관광객분들이 궁남지의 아름다운 풍경을 간직하고자 처럼 찿아들고 있었다
올해 축제에는 연꽃이 국화인 베트남, 캄보디아, 이집트, 카메룬, 스리랑카, 인도, 몽골 등 일곱 나라의 랜드마크 등으로 꾸며진 해외연꽃정원이 조성됐다.
일곱 나라 주한대사가 참석, 각국에서 가져온 연꽃 씨앗을 부여군에 기증하는 퍼포먼스도 열렸다고 한다.
식전행사와 주제공연에 이어 개막식의 하이라이트에서는 7개국 연꽃씨앗 기증 행사가 열기를 더했다 하고~~
부여군은 기증받은 연꽃씨앗을 서동공원에 식재해 관광자원화 하고,
앞으로 7개국과의 교류활동을 확대해 세계적인 축제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넓혀 나간다는 계획이라한다.
7개국 축하사절단의 고품격 공연과 함께 연꽃의 향과 어우러지는 힐링음악회를 끝으로 개막식은 끝이 났다.
밤에는 123년간 화려했던 사비왕궁과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 이야기 등을 재현한 LED 조명이 펼쳐진다.
연꽃축제 행사는 끝났지만 궁남지의 아름다운 모습은 사시사철 개방된다.
주차비는 물론 입장료도 없다.
무슨 건수만 있다하면 돈을 받는곳과는 대조적이다.
물론 돈이 목적이 아니라 부여는 백제의 문화를 였볼수 있는곳이다. 여행지로서 강추하고 싶은곳중 한 장소이다
나는 궁남지에 들렸다 부소산성과 삼천궁녀의절개가 서려 있는낙화암을 관광하고자 한다.
♣연꽃♣
생물의 주검 온갖 오물들
부패로 질펀하게 흔들리는 늪속일망정
인내의 뿌리 깊디깊게 박고
넌 얼마나
바보 같은 용서의 가슴 가졌길래
그토록 곱게 웃을 수 있느냐
(손석철·시인, 1953-)
우리나라 무궁화꽃도 아름답게 고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서동공원(궁남지)
백제 무왕 때에 궁궐의 남쪽에 만든 큰 연못으로,『삼국사기』에 의해서 궁남지라고 부른다.
다만 연못이 어떤 모습으로 조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현재 연못 주변에는 우물과 몇 개의 주춧돌이 남아 있고, 동쪽에서는 주춧돌과 기와 조각이 흩어져 있는 건물터가 확인된다.
연꽃은 한 가지 종류만 있는 줄 알았는데, 꽃 색깔도 다양하고 연꽃 종류도 너무 다양하다.
연꽃보는것만으로 힐링이되는것 같다.
여간해서는 꽃을 보기 어렵다는 가시연은 둥근 방패 모양의 가시 갑옷 사이로 보라빛의 영롱한 속살을 드러냈고, 낮에 피었다가 저녁에는 꽃봉우리를 웅크리고 잠을 잔다는 수련, 연분홍 홍련도 수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서동 왕자와 선화 공주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전해오는 궁남지에는 연꽃이 활짝 펴 장관을 이루고 있다.
보이는건 모두가 모델이요, 서있는 장소마다 포토 죤이 되여 버린다.
형형색색의 연꽃을 감상하려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고 저마다의 추억을 간직하고자 셔터누르기에 정신없어 보인다.
이번 부여서동연꽃축제는 '세계를 품은 궁남지, 밤에도 빛나다!'란 주제로 열렸다.
연꽃은 종류가 아주 다양하다.
6월이면 늪지에서 연꽃들이 크고 탐스러운 꽃을 피운다. 이 연꽃을 찾아 떠나는 여행도 여름 여행의 좋은 테마가 된다.
연꽃 여행을 떠날 때는 반드시 모자와 식수를 준비하는 것이 좋다. 연꽃 명소들이 대부분 그늘이 없어 따가운 햇살을 그대도 받기 때문이다.
또 연꽃은 오후가 되면 꽃봉오리를 닫기 때문에 오전에 찾아가는 것이 좋다.
부여 궁남지에는 전설의 연꽃이라 불리는 '오오가하스'와 새벽에만 꽃봉오리가 피는 '수련', 연분홍 빛깔의 '홍련'까지 천만송이의 형형색색의 연꽃들이 저마다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으며 뜨거운 열정과 사랑이 가득한 궁남지에서 연꽃 향을 맘껏 누려도 좋을 것으로 보여진다.
♣ 연꽃 ♣
연잎에 맺힌 이슬방울 또르르 또르르
세상 오욕에 물들지 않는 굳은 의지
썩은 물 먹고서도 어쩜 저리 맑을까
길게 뻗은 꽃대궁에 부처님의 환한 미소
혼탁한 세상 어두운 세상 불 밝힐 이
자비의 은은한 미소 연꽃 너밖에 없어라.
(이문조·시인)
연꽃의 꽃말의 경우 우리나라에는 "순결","순수한 마음" 이다.
중국에서는 "당신을 생각 하느라 잠을 이룰수 없습니다" 라고 하고~
일본에서는"저를 구해주세요" 라는 뜻이랍니다.
연꽃의 꽃말은
신성, 청정, 군자, 순결 등이 있다.
동양 불교와 유교문화권에서 좋아하던 꽃이다.
불교에서는 더러움에 물 들지 않는다고 해서 청결, 청정함을 뜩하고
유교에서는 향이 맑고 꽃이 기품이 있어 군자를 상징한다고 생각했다.
순결, 군자, 신성, 청정 배신, 청결, 신성, 당신모습이 아름다운 것만큼 마음도 아름답다
연꽃은 한 가지 종류만 있는 줄 알았는데~~
연꽃 종류도 다양하고 색깔도 다양 다양해서 보는것만으로 릴링이 된다
궁남지에는 모양도 크기도 색깔도 다양한 50여 종, 천만 송이에 달하는 연꽃이 향연을 펼치고 있다.
더운날씨지만 관광객들은 양산과 모자를 쓰고 거닐며 연꽃 감상에 빠져있다.
사진 애호가들도 연신 셔터를 누르며 고운 자태를 뽐내는 연꽃을 카메라에 담느라 여념이 없다.
궁남지 포룡정을 중심으로는 대형 수상 연꽃 조형물이 설치돼 있어 밤마다 홀로그램 쇼가 펼쳐진다.
멸종위기종을 비롯해 천만 송이의 연꽃들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관광객들을 유혹하고 있다.
연꽃을 국화로 한 세계 7개국이 꾸미는 해외연꽃나라 공연,
축제기간은 긑났어도 궁남지를 유람하는 카누체험도 색다른 추억과 체험 거리가 될 것이다.
진흙에서 크는 자신을 숨기기 라도 하듯
큰 잎으로 빼곡히 바닦을 감추고
꽃대를 따로 올려 피어내는 고귀한 자태
그리 진하지 않은 연한색으로 채색된 꽃잎
과하지 않은것 같아 거부감이 없다
어릴적 갑짜기 소나기라도 내리면 우산 대용으로도 사용했던 기억이 있어 더 정이 가는 잎까지...
여름꽃 중 좋아 할 수 밖에 없는 아름다움이다
연꽃은 뿌리와 잎 열매까지 아낌 없이 먹거리로 내어 주는 고마움이
연꽃을 자주 찾게되는 이유 중 하나다
아기 자기하게 코 앞에서 볼 수 있게 꾸며 놓은 궁남지
양옆으로 흐트러지게 피어 있는 오솔길을 걷다 보면
마음은 어느새 여유로움으로 한가득
여기 저기 찾는이가 탄성을 자아내게하는 궁남지,힐링의 순간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 연못으로 알려진 부여 궁남지 주변 30만제곱미터의 정원에 1천만 송이의 연꽃 향연이 펼쳐졌다.
사진 애호가들은 빛에 따라 달라지는 형형색색의 연꽃을 담느라 여념이 없고, 탐방객들은 은은한 연꽃향에 마음을 뺏았기고 말았다.
궁남지는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 이야기가 깃든 곳이다.
가시연꽃, 빅토리아연꽃 등 약 50여 종 의 연꽃을 8월까지 오시면 감상하실 수 있다한다.
진흙탕 속에서도 아름다운 꽃이 피고 흙탕물이 묻지 않는다는 특성 때문인지, 동양문화권에서는 연꽃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종교가 몇 개 있다.
인도의 종교에서도 연꽃은 중요한 상징이다. 베다 시기부터 연꽃은 신의 상징으로 사용되어 왔는데, 힌두교의 최고신 중 하나인 브라흐마는 연꽃에 앉아있으며 비슈누의 지물 중에는 연꽃 봉우리 모양을 한 몽둥이가 있다.
불교에서 연꽃은 더더욱 중요시되어서, 당장 절에 가서 불상을 보면 그 대좌가 연꽃 모양이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진흙 속에서도 깨끗하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연꽃은 그 때문에 부처님의 자비와 지혜를 나타내는 식물로 여겨진 것이다. 불교계 학교의 경우, 교화(校花)가 연꽃인 경우도 흔하다. 예를 들어 진선여자중학교, 진선여자고등학교, 동국대학교 등.
도교의 신 중 나타태자는 연꽃에서 태어나 연꽃의 화신이라는 별칭이 있다. 사실 나타도 원산지는 인도에다 불교에 수용되어 도교로 흡수되었다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 중국에 들어온 신이라 뜬금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유교에서도 연꽃은 사랑받았는데, 이유는 더러운 연못에서 깨끗한 꽃을 피우는 모습이 절개를 중시하는 선비들의 기풍과 잘 맞았기 때문. 북송시대 유학자 주돈이는 연꽃의 모습을 군자의 덕에 빗대는 '애련설(愛蓮說)'이라는 글을 남겼다. 다만 유교에서는 사군자가 일반적이어서 연꽃의 비중은 상대적으로 적다.
고대 이집트에서 부활, 영생을 상징했고 흔히 신이나 파라오와 함께 그렸다는 꽃은 일반적인 연꽃이 아니라 수련(2번째 사진)이다.
포룡정의 시원한 물줄기가 더위를 확달아나게 해준다.
추워 추워 하면서 외투를 꼭곡 여미던 날이 엇그제 같은데 ~~
세월의 무상함이 야속도 하다 ㅎ ㅎ
"포룡정'
『삼국사기』백제본기 무왕 35년(634)조에는 “3월에 궁의 남쪽에 연못을 파서 물을 20여 리나 끌어들였다. 네 언덕에는 버드나무를 심고 연못 가운데에는 섬을 만들어 방장선산을 모방하였다”고 하였고, 같은 왕 39년조에는 “봄 3월에 왕과 왕비가 큰 연못에 배를 띄웠다”고 하였다.
한편『삼국유사』기이제2 무왕조에는 “무왕의 이름은 장(璋)으로, 그의 어머니가 과부가 되어 서울 남지(南池) 주변에 집을 짓고 살던 중, 그 못에 사는 용과 정을 통하여 장을 낳고 아명(兒名)을 서동(薯童)이라 하였는데, 그 도량이 커서 헤아리기가 어려웠다”라고 하였다. 백제가 멸망한 뒤에는 훼손되어 연못 주변은 농지로 이용되었으며, 현재 연못의 규모는 1만평도 채 안 되는 형편이다.
연못 한가운데 정자의 이름을 포룡정, 이곳에는 서동의 어머니와 관련된 전설이 내려온다.
궁궐 남쪽에 사는 한 여인이 어스름한 달밤 잠을 못 이루고 연못으로 산책을 나갔다. 그때 갑자기 못에서 물결이 일더니 용이 나타나 여인을 노려보았다. 그후 태기를 느낀 여인은 열달 뒤 한 아이를 낳았다. 과부의 몸에서 태어난 이 아이는 어려서부터 늘 마(薯?)를 캐어 팔아 집안 생계를 도왔기에 서동(薯童), 곧 맛동이라 불렀다. 포룡이라는 이름은 용과 정을 통했다는 기이한 이야기에서 유래됐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삼국사기에 실려있는 이 전설을 하나의 은유로 보고 있다. 용은 곧 임금이고 서동은 임금과 미천한 신분의 여인 사이에서 출생한 서자라는 주장이다.
. 무왕은 풍수지리설에 따라 인근에 위치한 금성산에서 뻗어 내려오는 영기가 사방으로 흩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평야 한가운데 못을 만들었다고 전한다.
연못은 인공적으로 동그랗게 또는 네모 반듯하게 꾸며진 것이 아니라 물이 많으면 많은 대로 적으면 적은 대로 연못 모양이 자연스럽게 형성되도록 만들어졌다.
그러나 3만평에 달하는 거대한 연못이 천년 세월을 거치는 동안 조금씩 흙으로 메워져 크기가 3분의 1정도로 줄어들어 현재는 1만 3,772평에 이른다. 경주의 안압지보다 40년이나 앞서 조성되었다는 우리 나라 최초의 인공조원, 이 둥근 못 한가운데 작은 섬이 떠 있고 못가에 휘늘어진 버드나무 가지가 한가롭다.
한가롭고 평화스러운 궁남지, 이 연못에서 더욱 진한 백제의 향기를 느낄 수 있기를.
연못은 자연 지형의 곡선을 그대로 이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연못의 가운데와 물가에는 석축과 버드나무가 남아 있고, 연못 주변에서는 토기와 기와 등 백제시대의 유물이 출토되고 있으므로, 연못 속의 섬이 바로 방장선산을 모방하였다는 섬으로 추정된다. 이것은 동해 한가운데에 신선이 사는 섬인 봉래(蓬萊)·방장·영주(瀛州)의 삼신산(三神山)이 있다고 하여, 그 섬 가운데 방장선산을 본따서 신선정원(神仙庭苑)을 꾸며 불로장생을 바랐던 도교적 사상과 관념이 표현된 것으로 이해된다.
대형 연꽃이 핀 포룡정에 소원등을 띄우는 이색행사와 환상적인 불빛으로 궁남지를 빛낸 경관조명을 즐기러 온 관광객들로 늦은 밤까지 인산인해를 이뤘다고한다.
시간만 있다면 야간 경관도 함께 즐기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현재연못은1965년~67년 복원한곳으로 원래자연 늪지의 1/3정도 규모이다.
궁남지는 삼국유사에 기록된 백제국 제30대 무왕의 탄생설화와 백제국 서동왕자와 신라국
선화공주의 국경을 초월한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어
오늘날에도 사랑하는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 유명하다.
연못과 포룡정이라는 정자, 이를 둘로싼 수양버들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어 옛 백제국의
자연미를 느낄 수 있어 우리나리 최고의 산책코스로 알려져 있다한다.
연못 주위에 심은 수양버들의 늘어진 나뭇가지와
시원하게 뿜어 올리는 분수가 어우러져
포룡정은 고풍스러움을 더하고
시원스러움을 느끼게 한다.
한 여름, 수면 위로 피는 연꽃은 매우 크고 아름다워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다
연꽃은 사람들에게 많은 걸 주는 것 같다.
연꽃으로 인해 눈으로 기쁨을 주고 연잎밥으로 입을 즐겁게 해주고 뿌리인 연근으로 건강을 챙기게 해주니 사람의 눈,입,건강을 챙겨주는 고마운 연꽃이다.
연꽃축제에 해바라기도 있다.
내가가 좋아하는 꽃중하나인 해바라기꽃
날씨는 무더운데 궁남지의 현 모습은 가을을 연상케한다.
파란하늘아래 해바라기가 미소 짓고 가을꽃 하면 코스모스 아니던가.??
연꽃은 오염된 물과 더러운 진흙에서 자라지만 전혀 오염되지 않고
너무도 아름답고 깨끗하고 고고하게 꽃을 피운다.
우리사는 세상도 일부 몰지각하고 파렴치한 사람들이 함께 사는
세상이지만 연꽃과 같은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가져본다.
백제 시대 만들어진 인공연못 궁남지에 연꽃 세상이 펼쳐졌다.
2천 년 전 씨앗을 발아시켜 꽃을 피워 전설의 연꽃으로 불리는 '대하연'부터,
보랏빛 꽃망울을 터트린 멸종위기종 '가시연'과 연분홍빛 '홍련'까지 저마다 아름다움을 뽐낸다.
손대면 톡 하고 터질 것만 같은 꽃봉오리들도 아직 가득하다.
관광객들은 어느새 연꽃에 마음을 빼앗겨 버렸고, 형형색색 연꽃을 카메라에 담느라 분주하다.
연꽃이 피었습니다.
가장 더러운 곳에서 가장 깨끗한 꽃을 피워내는
존엄하고 거룩하고 숭고(崇高)한 꽃 연꽃이 피었습니다.
연꽃은 깨끗한 곳이 아니라 진흙탕같은 더러운 곳에서만 자라는데 연꽃이 꽃을 피우는 순간
주위는 깨끗해지고 냄새도 사라진다., 그리고 늘 줄기와 잎이 청정한 상태를 유지한다,
♣연꽃♣
꽃은 물론 잎 모양도 좋아 관상용으로 가장 많이 이용된다. 흐르는 물보다는 정체되어 있는 연못이나 저수지, 강가에 주로 핀다. 수질정화 능력도 상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뿌리(연근)는 채소로 잘 알려져 있다. 꽃이 7∼8월에 빨강, 분홍, 흰색 등으로 피며 매우 화려하다. 잎과 꽃을 모두 관상용으로 이용할 수 있어 현재 이용되는 대표적인 수생식물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연꽃에는 10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10가지 특징을닮게 살아가는사람을연꽃처럼 아름답게 사는 사람이라고 한다▼
1. 이제염오(離諸染汚)
이제염오(離諸染汚) : 더러운 곳에서 났지만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다.
연꽃은 진흙탕에서 자라지만 진흙에 물들지 않는다.
주변의 부조리와 환경에 물들지 않고
고고하게 자라서 아름답게 꽃피우는
사람을 연꽃같이 사는 사람이라고 한다.
이런 사람을 연꽃의 이제염오(離諸染汚)의
특성을 닮았다고 한다.
2. 불여악구(不與惡俱)
불여악구(不與惡俱) : 악한 것과 함께 하지 않는다.
연꽃잎 위에는 한 방울의 오물도 머무르지 않는다.
물이 연잎에 닿으면 그대로 굴러 떨어질 뿐이다.
물방울이 지나간 자리에 그 어떤 흔적도 남지 않는다.
이와 같아서 악과 거리가 먼 사람,
악이 있는 환경에서도 결코 악에 물들지 않는
사람을 연꽃처럼 사는 사람이라고 한다.
이를 연꽃의 불여악구(不與惡俱)의
특성을 닮았다고 한다.
3. 계향충만(戒香充滿)
계향충만(戒香充滿) : 향기가 충분하다. 계를 지키는 사람의 인품도 이와 같다.
연꽃이 피면 물속의 시궁창 냄새는
사라지고 향기가 연못에 가득하다
한사람의 인간애가 사회를 훈훈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렇게 사는 사람은 연꽃처럼 사는 사람이라고 한다.
고결한 인품은 그윽한 향을 품어서 사회를 정화한다.
한자락 촛불이 방의 어둠을 가시게 하듯
한송이 연꽃은 진흙탕의 연못을 향기로 채운다.
이런 사람을 연꽃의 계향충만(戒香充滿)의
특성을 닮은 사람이라 한다.
4. 본체청정(本體淸淨)
본체청정(本體淸淨) : 줄기와 잎이 청정해서 물이 묻지 않는다.
연꽃은 어떤 곳에 있어도
푸르고 맑은 줄기와 잎을 유지한다.
바닥에 오물이 즐비해도 그 오물에 뿌리를 내린
연꽃의 줄기와 잎은 청정함을 잃지 않는다.
이와 같아서 항상 청정한 몸과 마음을 간직한
사람은 연꽃처럼 사는 사람이라고 한다.
이런 사람을 연꽃의 본체청정(本體淸淨)의
특성을 닮은 사람이라 한다.
5. 면상희이(面相喜怡)
면상희이(面相喜怡) : 꽃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절로 기쁨이 솟는다.
연꽃의 모양은 둥글고 원만하여 보고 있으면
마음이 절로 온화해지고 즐거워진다
얼굴이 원만하고 항상 웃음을 머금었으며
말은 부드럽고 인자한 사람은
옆에서 보아도 보는 이의 마음이 화평해진다.
이런 사람을 연꽃처럼 사는 사람이라고 한다.
이런 사람을 연꽃의 면상희이(面相喜怡)의
특성을 닮은 사람이라고 한다.
6. 유연불삽(柔軟不澁)
유연불삽(柔軟不澁) : 유연하고 거칠지 않다.
연꽃의 줄기는 부드럽고 유연하다.
그래서 좀처럼 바람이나 충격에 부러지지 않는다.
이와같이 생활이 유연하고 융통성이 있으면서도
자기를 지키고 사는 사람을
연꽃처럼 사는 사람이라고 한다.
이런 사람을 연꽃의 유연불삽(柔軟不澁)의
특성을 닮은 사람이라고 한다.
7. 견자개길(見者皆吉)
견자개길(見者皆吉) : 연꽃을 보거나 꿈꾼 사람은 그날 하루가 길하다.
연꽃을 꿈에 보면 길(吉)하다고 한다.
하물며 연꽃을 보거나 지니고 다니면
좋은 일이 아니 생기겠는가?
많은 사람에게 길(吉)한 일을 주고 사는
사람을 연꽃처럼 사는 사람이라고 한다.
이런 사람을 연꽃의 견자개길(見者皆吉)의
특성을 닮은 사람이라고 한다.
8. 개부구족(開敷具足)
개부구족(開敷具足) : 활짝 피면 이지러진 데 없이 완전한 꽃이 된다.
연꽃은 피면 필(必)히 열매를 맺는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꽃피운 만큼의 선행(善行)은 꼭 그만큼의 결과를 맺는다.
연꽃 열매처럼 좋은 씨앗을 맺는 사람을
연꽃처럼 사는 사람이라고 한다.
이런 사람을 연꽃의
개부구족(開敷具足)의 특성을 닮은 사람이라 한다.
9. 성숙청정(成熟淸淨)
성숙청정(成熟淸淨) : 자랄수록 청정해진다.
연꽃은 만개(滿開)했을 때의 색깔이 곱기로 유명하다.
활짝핀 연꽃을 보면 마음과 몸이
맑아지고 포근해짐을 느낀다.
사람도 연꽃처럼 활짝 핀 듯한 성숙감을
느낄 수 있는 인품의 소유자가 있다.
이런 분들과 대하면 은연중에
눈이 열리고 마음이 맑아진다.
이런 사람을 연꽃처럼 사는 사람이라고 한다.
이런 사람을 연꽃의 성숙청정(成熟淸淨)의
특성을 닮은 사람이라 한다
10.생이유상(生已有想)
생이유상(生已有想) : 어린 싹일 때부터 연꽃임을 알 수 있다.
연꽃은 날 때부터 다르다.
넓은 잎에 긴 대, 굳이 꽃이 피어야
연꽃인지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다.
연꽃은 싹부터 다른 꽃과 구별된다.
장미와 찔레는 꽃이 피어봐야 구별된다.
백합과 나리도 마찬가지다.
이와 같이 사람 중에 어느 누가 보아도
존경스럽고 기품있는 사람이 있다.
옷을 남루하게 입고 있어도
그의 인격은 남루한 옷을 통해 보여진다.
이런 사람을 연꽃같이 사는 사람이라고 한다.
이런 사람을 연꽃의 생이유상(生已有想)의
특성을 닮은 사람이라고 한다.
연꽃축제에왔으니 연잎밥을 먹지않고서야 연꽃 축제에 왔다고 말할수 있는가 .
궁남지 축제장근처 연화향으로 향한다.
평일에는 연잎밥과 갈비탕도 겸하지만 축제기간에는 연잎밥만 제공한다.
1인:15,000원 가격대비 괜찮다는 느낌이다.
밑반찬도 깔끔하고~~
연잎밥은 잣, 호두, 대추, 밤 등의 재료를 넣고 밥을 지은 후, 다시 그 밥을 연잎으로 싸서 찌고 뜸을 들여야 완성된다. 밥을 짓고 뜸을 들이고, 다시 찌고 또 뜸을 들이는 정성은 물론, 기다리고 또 기다리면서 성급한 마음이 잦아든 후라야 비로소 연잎 향이 깊이 스민 밥을 맛볼 수 있다. 밥을 싸는 연잎은 어린잎보다는 늙은 연잎으로 해야 제 맛이 난다는 점도 의미가 깊다. 연륜 있는 노인처럼 이파리에 거뭇거뭇한 검버섯이 피어난 연잎일수록 연잎밥 재료로 적당하니, 세월을 감내한 후라야 깊은 깨달음을 얻는 사람의 인생과도 닮았다. 잘 익은 연잎을 벗겨내 모락모락 김이 나는 차진 밥을 한 입 베어 물고 천천히 씹다 보면 그윽한 향이 입 안 가득 차오른다.
궁남지 여행을 끝내고 부소산성과 낙화암을 관광하기 위해 자리를 옮긴다.
부소산성
시 대:고대.삼국
문화재 지정:사적 제5호
건립시기:백제시대
소재지: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부소산문매표소"
입장료2,000원
서울로 가야하니 부소산성 답사는 느긋하게 걸어 2시간 소요되는 부소산문(매표소)~삼충사~영일루~군창지~반월루~사자루~ 낙화암(백화정)~고란사~(유람선타고)~구드레공원으로 오는 코스를선택해서 관광한다.
부소산성이 있는 부소산은 부여읍 쌍북리, 구아리,구교리에 걸쳐 있는 부여의 진산으로 해발 106m로 산세가 완만하여 부여의 신시가지와 백마강을 조망할수 있으며 백제 유적이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부소산 산 이름은 조선시대 ‘세종실록지리지’에 처음 보이며 부소의 뜻은 백제시대 언어로 소나무(松)의 뜻과 “솔뫼” 즉 소나무가 많은 산으로 뜻한다.
부소산성 )扶蘇山城) 사비성, 소부리성
둘레 2,200m, 사적 제5호. 지정면적 98만3900㎡. 부소산의 산정을 중심으로 테뫼식 산성을 축조하고 다시 그 주위에 포곡식(包谷式) 산성을 축조한 복합식 산성으로, 성내에는 사비루(泗沘樓)·영일루(迎日樓)·반월루(半月樓)·고란사(皐蘭寺)·낙화암(落花巖)과 사방의 문지(門址), 그리고 군창지(軍倉址) 등이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사비성(泗沘城)’·‘소부리성(所夫里城)’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산성이 위치한 산의 이름을 따서 부소산성으로 불리고 있다.
부소산성은 백제의 수도인 사비(泗沘)를 수호하기 위하여 538년(성왕 16) 수도 천도를 전후한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나, 이보다 먼저 500년(동성왕 22)경 이미 산봉우리에 테뫼형 산성이 축조되었다가 천도할 시기를 전후하여 개축되었고, 605년(무왕 6)경에 현재의 규모로 확장, 완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세계역사문화 유적지구에 등재되여져있는 퇴뫼식 토성인 부소산성,
현재까지 발굴로 드러나는 백제왕궁터와 백제여인의 이야기를 품고 있는 낙함암 등으로 다양한 역사유적지로서의 매력도 갖고 있는 추천 관광지이다. 부여의 대표관광지이자 부여10경 중 하나인 부소산성은 부여시가지 한 가운데 위치해 있고, 역사문화관광지로서 부여를 찾아오는 관광객이 제일 먼저 찾는 부여의 명소이
며, 인근의 국립부여박물관, 정림사지박물관 및 궁남지와 함께 매년 많은 역사문화관광객들이 찾고 있다.
백제역사유적지구(Baekje Historic Areas)는 공주시, 부여군, 익산시에 있는 백제 관련 역사유적지구이다. 2015년 7월 4일 독일 본에서 열린 제39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에서 세계유산 등재 심사를 최종 통과하여 대한민국의 12번째 세계유산이 되었다. 백제역사유적지구는 총 8개의 유적을 포함한 연속유산으로 공주시에 2곳(공산성, 송산리 고분군), 부여군 4곳(관북리 유적 과 부소산성, 능산리 고분군, 정림사지, 부여 나성), 익산시에 2곳(왕궁리 유적, 미륵사지)을 포함한다.
부소산성은 아름다운 적송과 토성이 잘 어우러져 백제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산성이다.
수목이 울창한 부소산성을 걸으니 상쾌한 기분은 물론 가슴이 뻥뚤리고 활력이 되살아 나는 느낌이다.
신비한성분 '피톤치드'를 방출하는 숲의나무들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순간이다.
태자골 숲길 이정표가 눈에 들어온다.
옛 백제 왕자들의 산책로라 한다.
비록 태자는 아닐지라도 태자가된 느낌으로 위엄있게??? 걸어보자
▼삼충사▼
삼충사
부여 삼충사(扶餘 三忠祠)는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에 있는, 백제 시대의 충신이었던 성충, 흥수, 계백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1957년에 세운사당이다.
그러구 보니 나하고 같은 57년 닭띠내 친구야 반갑다.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의 문화재자료 제115호로 지정되었다.
성충은 백제 의자왕 때 좌평으로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기 위해 애쓰다가 투옥되어 식음을 전폐하고 죽은 충신이다.
흥수는 나당연합군이 공격해오자 탄현을 지키라고 의자왕에게 간곡하게 당부하였던 것으로 유명하다.
계백은 신라 김유신장군의 5만군이 황산벌로 쳐들어오자 5천 결사대로 싸우다 황산벌에서 장렬히 죽은 장군이다
가볍게 편안한 맘으로 걷는것 만으로도 족한 부소산성이다.
고대 백제의 태자 처럼 세상을 얻은 마음으로 걸어보자
고목이 된 참나무와 부소산 소나무 향을 음미하며~~짙푸른 녹음과 백마강 바람을 끌어 안고
▼영일루▼
영일루(迎日樓)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부소산 동쪽 봉우리에 자리잡고 있는 누각이다.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의 문화재자료 제101호로 지정되었다
부여에 있는 부소산 동쪽 봉우리에 자리잡고 있는 누각으로, 이곳에서 보면 멀리 공주 계룡산의 연천봉이 아득히 바라다 보인다.
원래 이곳에는 영일대가 있어서 계룡산 연천봉에서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던 곳이라고 전한다.
이 건물은 고종 8년(1871)에 당시 홍산 군수였던 정몽화가 지은 조선시대의 관아문이다. 1964년에 지금 있는 자리인 부소산성 안으로 옮겨 세운 뒤, 집홍정이라는 건물의 이름을 영일루라고 고쳐 불렀다.
영일루는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의 2층 누각 건물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정면에는 ‘영일루’라는 현판이 걸려 있으며, 다른 관아문에 비해 그 규모가 비교적 큰 것이 특징이다.
부소산성은 부소산의 정상과 능선을 따라 흙으로 쌓았고 총 길이는 1.5km 되며, 낙화암과 고란사 방향의 절벽으로 백마강이 흐르고 있는 천연 자연요새이기에 백제가 공주에서 사비로 천도한 이래 상당한 기간동안 나라를 유지할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중간 중간에 흙으로 쌓은 성벽의 모습이 보인다.
부소산성군창지
영일루를 지나 만나는 곳은 1915년에 불에 탄 쌀이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진 군창지(충남 문화재자료 제109호)로 일명‘만리창’으로 불렸던 유적지다.
군창지는 ㅁ자 형태를 이루는 4기의 조선시대 건물지와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사용한 건물로 지형상 군사목적(곡식저장창고)의 건물지로 추정된다.
지금은 울타리로 쳐진 솔숲과 잔디로 이루어져 있어 그 모습만을 상상할 뿐이다
부소산성안에는 매점이 있어 간단한 음료나, 물, 아이스크림등으로 갈증을 풀고 산책할수 있다.
부소산성은 2002년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22세기를 위해 보전해야 할 아름다운 숲”으로 선정되었다.
부여10경 중 하나인 부소산성과 인근의 국립부여박물관,정림사지박물관,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 제9호),궁남지와 함께 부여의 대표적 관광지이다.
"부소산성 수혈건물지 자료관"
군창지를 지나지를 지나 수혈주거지를 만날 수 있었다.
시간상 내부관람은 하지 못하고 패스~~
수혈주거지는 1980년 발굴된 움집터로 아궁이 바닥에서 출토된 백제토기 뚜껑과 집 주위에서 출토된 무구류의 유물등으로 보아 5~6세기 백제병영의 집자리로 추정된다. 지표아래 풍화암층을 깊이 70cm~90cm정도로 깎아 내려가 방바닥과 아궁이,구들등의 시설과 기둥을 세웠던 구멍과 저장구멍, 목책을 세웠던 유구가 있다.
▼반월루▼
부소산성의 테뫼식 산성과 포곡식 산성이 만나는 등성이에 있는 반월루로 갔다. 1972년에 지은 2층누각으로 이곳에서는 부소산성 토성을 가장 아름답게 만날 수 있는 곳이다. 2층 누각으로 올라가니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부여의 시가지가 한눈에 펼쳐졌다.
파란하늘과 뭉게구름 아래로 부여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좌측 다녀온 궁림지와 우측 벡마강이조망되는곳 반월루
반월루에서 사자루로 가는길은 토성의 옆으로 이어지는 내리막길이다.
내려가다보니 낙화암간길목에 또하나의 매점이있다.
잠시 쉬었다 간다,
패트병에 커피 믹서해서 어름물에 담갓다 판매한다.
한병 2,000원 갈증나니 마셔야지 어쩌겠남 ~~
부소산성길은 소소하지만 행복을 느끼며 걸을수 있는길이다.
혹자는 대한민국 어느 산성길도 다 비슷비슷하다고 말한다,
물론 틀린말은 아니지만지만 내생각은 각 산성마다의 개성이있다는건 확실하다.
진정한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보는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가지는데 있다 -마르셀 푸르스트 -
▼사자루▼
"사자루"
사자루(충남문화재자료 제99호)는 수소산에서 가장 높은곳(해발106m)인데 영일루가 일출을 보는곳이라면 이곳은 왕과 귀족들이 달을 보며 하루의 국정을 되돌아보고 마음을 정리했던 곳으로 동쪽으로 계룡산 서쪽으로 구룡평야 남쪽으로 성흥산성, 북쪽으로 울성산성등 산수의 조화가 극치를 이룬곳이라고 전해지는데 지금은 사방으로 나무가 울창하게 자라 나무사이로 살며시 보이는 금강줄기와 누각옆으로 잔잔한 단풍만이 풍경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사자루에서는 나무들이 시야를가려 백제문화단지만이 조망된다
사자루를 거쳐 20m전방에 낙화암과 백화정기다리고 있다.
"백화정(충남문화재자료 제108호)"
백화정(충남문화재자료 제108호)은 백마강을 한눈에 내려다 볼수 있는 낙화암 정상바위위 육각으로 세워진 정자로 백제 멸망당시(서기660년) 낙화암에서 꽃잎처럼 떨어져 죽음으로 절개를 지킨곳이다. 백화정옆에는 천년의 세월을 안고 있는 천년송이 백제여인들의 절개를 지키듯 꼿꼿함을 간직한채 서있었다.
"백화정(白花亭)"
백제 멸망 당시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궁녀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해 1929년에 지은 정자이다.
‘백화정’이란 이름은 중국의 시인인 소동파의 시에서 따온 것이다. 부소산성 북쪽 백마강변의 험준한 바위 위에 자리잡고 있다.
건물 구조는 육각형 평면을 가진 육모지붕으로 꾸몄다. 마루 바닥 주변에는 간단한 난간을 설치하였고, 천장에는 여러가지 연꽃무늬를 그려 놓았다
백제의 전설인 낙화암의 일출을 보기 위해 관광기자들이 많이 찾는 다는 곳 백화암 .
우측 끝부근에 백마강교가 보이고 백마강 레져 파크시설도 조망되고~~
정면으로는 백제문화 단지도 조망된다. 좌측으로는 왕흥사지 터다
수려한 주변 전경과 함께 역사와 문화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다양한 역사문화 유적이 산재해 있어, 역사문화 교육의 산 교육장으로 추천 할 만한 장소이다.
"낙화암 전경"
낙화암과 관련되어 전해오는 전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은 용담(勇談)이 많은 영주(英主)였는데, 여러 차례 신라의 여러 고을을 쳐서 천하에 그 성세(聲勢)를 높인 뒤로는 정사는 돌보지 않고 날마다 궁성 남쪽의 망해정(望海亭)에서 궁녀들을 데리고 가무주연(歌舞酒宴)의 향락을 일삼았다.
좌평 성충(成忠)은 이를 근심하고 극력 간(諫)하였으나, 왕은 이 말이 귀에 거슬려 그를 옥에 가두어버렸다. 그러자 그는 마음이 아파서 죽고 말았다.
이러할 때 일찍이 백제의 침략을 받아온 신라는 무열왕 및 김유신(金庾信) 등의 영주와 명신(名臣)이 나타나서 나라의 힘을 크게 길러 복수를 하고자 당나라 군사와 힘을 합하여 백제를 치게 되었다. 이에 백제의 용장 계백(階伯)은 4천의 적은 군사로써 황산(黃山)벌에서 신라 군사와 싸웠으나 패하고 말았다.
그러자 나당연합군의 수많은 군사가 일시에 수륙 양면에서 쳐들어와 왕성(王城)에 육박해오자 왕은 그제야 성충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음을 후회하였다. 왕은 하는 수 없이 해질 때를 기다려 왕자 효(孝)를 데리고 웅진성(熊津城)으로 달아나서 싸웠으나 성문은 부서져 열리고 말았다.
수많은 궁녀들이 슬피 울면서 흉악한 적군에게 죽는 것보다 깨끗하게 죽는 것이 옳다 하여 대왕포(大王浦) 물가 높은 바위 위에서 치마를 뒤집어쓰고 사비수 깊은 물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 이러한 일로 인하여 이 바위를 낙화암이라 하였다고 한다.
"낙화암(落花岩)"
낙화암은 백제의 700년 사적이 무너지던 날, 왕을 모시던 궁녀들이 그 몸을 지켜 여기 천인절벽의 바위에서 꽃잎처럼 떨어져 백마강에 원혼을 묻었다.
『삼국유사』에 인용된 백제고기(百濟古記)에 의하면 부여성 북쪽 모퉁이에 큰 바위가 있어 아래로는 강물에 임하는데, 모든 후궁들이 굴욕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차라리 죽을지언정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고 하고, 서로 이끌고 이곳에 와서 강에 빠져 죽었으므로 이 바위를 타사암(墮死巖)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내용으로 보아 낙화암의 본래 명칭은 타사암이었는데, 뒷날에 와서 후궁이 궁녀로 와전되었고 이후 궁녀를 꽃에 비유하고 이를 미화하여 붙인 이름인것 같다,
삼천궁녀의 원혼을 달래며 낙화암에서 고란사로 향한다.
길은 멀지는 않지만 제법 까탈 스럽게 느껴지는 계단 비알길이다.
* 삼천궁녀의 넋을 기리는 사찰, 고란사 *
낙화암 아래 백마강가 절벽에 자리하고 있는 고란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이다.
절의 연혁에 대해서는 백제 말기에 백제 말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할 뿐,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일설에 의하면 이 절은 원래 백제의 왕들을 위한 정자였다고 하며, 또 궁중의 내불전(內佛殿)이었다고도 전한다. 백제가 멸망할 때 낙화암(落花岩)에서 사라져간 삼천궁녀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1028년(고려 현종 19)에 지은 사찰이라고도 한다.
"고란사 범종각"
법당 건물은 1797년(조선 정조 21년)에 은산의 숭각사에서 옮겨온 것이다.상량문에 의하면 조선 정조 21년(1797년)에 중건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연화문을 새긴 초석을 놓고 원기둥을 세웠는데 기둥 위에는 조각 장식이 화려한 익공식 공포를 짜올렸다. 초석에 새견 연화문양은 고려시대의 기법으로 추정된다
절 뒤 바위 틈에 고란정(皐蘭井)이 있으며, 그 위쪽 바위틈에 고란초(皐蘭草)가 나 있다
* 고란약수와 고란초의 전설 *
백제시대에 임금님은 항상 고란사 뒤편 바위 틈에서 솟아나는 약수를 애용하여, 매일같이 사람을 보내 약수를 떠오게 하였다. 마침 고란약수터 주변에서만 자라는 기이한 풀이 있어 이름을 '고란초'라 불렀다. 약수를 떠오는 사람들이 고란초의 잎을 하나씩 물동이에 띄워 옴으로써 그것이 고란약수라는 것을 증명하였던 것이다. 백제의 임금님이 약수를 즐겨 마셔, 원기가 왕성하고 위장병은 물론 감기도 안 걸리고 사셨다 한다. 또한, 고란약수를 한 잔 마시면 3년씩 젊어진다는 전설도 있다.
고란정에서 약수 한잔 마시고 백마강에 떠있는 고란사 선착장으로 향한다,
앞쪽으로는 백마강교가 보인다
고란사 선착장
* 유람선을 타고 낙화암의 전설을 만난다 *
유람선을 타고 백제역사를 품에 안고 말없이 흐르는 백마강에는 백제시대 중요한 국사를 결정했다는 천장대, 낙화암, 조룡대, 구드래, 부산·대재각, 자온대,수북정 발길닿는 곳마다, 뱃길 가는 곳마다 백제를 만나볼 수 있다.
요금은 어른 기준 구드레 선착장 까지 어른기준 편도 4,000원 왕복 6,000원이다
구드레 선착장 까지 타고갈 황포돛단배의 모습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 황포돛대는 30명 이상이 되어야 운행이 가능하고 사람수가 적은 7명이상이면 일반 유람선을 이용해야 한다고 한다.
[일반유람선] 어른 7인 이상 승선시 출발가능
[황포돛배유람선] 어른 30명 이상 승선시 출발가능
마침7명이 일방유람선에 오르기에 나도 일반 유람선에 올라 구드레 선착장으로 노를 젗는다,
황포돛대 유람선을 뒤로 하고 구드레 선착장으로
낙화암 절벽 아래 백마강과 맞닿은 고란사 선착장 뒤로 에 조용하고 단아한 사찰 고란사가보인다.
낙화암에서 떨어져 죽음으로 절개를 지킨 백제여인들을 추모하는 의미로 고려시대 말기에 지어진 절로 백제 시대에는 이곳에 절이 아닌 사당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절 뒤쪽바위에서 자라는 고란초에서 유래해 절이름을 고란사라고 했다.
백마강(白馬江)
백마강또는 백강(白江)은 충청남도 부여군을 지나는 금강(錦江)의 하류 구간을 부르는 이름인데,
경우에 따라서는 금산군(錦山郡) 이남의 금강 중하류를 통틀어 가리키는 말로도 쓰인다.
일반적으로 금강변 부여읍(扶餘邑) 정동리의 앞 범바위[虎岩]에서부터 부여읍 현북리파진산 모퉁이까지의 약 16㎞ 구간을 백마강이라 한다.
"백마강위의 낙화암"
강가의 절벽이 마치 그림 병풍과 같아서 백제왕이 매번 놀고 잔치하고 노래하고 춤을 추어 지금도 대왕포라고 부를 정도로 풍경이 아름답다.
백마강 달밤에 물새가 울어
잃어버린 옛날이 애달프구나
저어라 사공아 일엽편주 두둥실
낙화암 그늘아래 울어나 보자
고란사 종소리 사무치는데
구곡간장 올올이 찢어지는 듯
누구라 알리요 백마강 탄식을
깨어진 달빛만 옛날 같으리
꿈꾸는 백마강-배호-
유람선에서 꿈꾸는 백마강 노래를 틀어준다.
노래들으며 고란사 선착장으로 향하는 황포돛대 유람선을 바라보며 흥얼거리다 보니~~
구드레 선착장에 도착한다
굿뜨레, 또는 구드레라고도 쓰이는 이 말은 보통 구드래라고 표기합니다. 부여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나루터 광장 이름이기도 하지요. 바로 이곳, 부여군 부여읍 구교리에 있는 부소산 서쪽 기슭의 백마강 나루터를 '구드래 나루터'라고 부릅니다. 부여에서 청양까지 통하던 나루터인데 지금은 백마강을 왕래하는 유람선의 선착장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구드래 나루터에서 유람선을 타고 백마강의 물살과 주변경관을 음미하는 것도 백제의 전설이 살아있는 부여를 체험하는 좋은 방법이 되겠지요.
구드래'라는 말은 지금 우리 나라 말에는 남아있지 않은 말이라고 한다. 오히려 일본어에는 구드래를 어원으로 삼은 '구다라'라는 말이 있는데 '큰 나라' '본국'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면서, 우리 역사에서 삼국시대의 한 축인 '백제'를 가리키기도 한답니다. 과거 백제가 일본에 선진문물을 전달하는 통로역할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일본사람들이 백제를 대국(大國), 즉 큰 나라 혹은 자신들이 섬기는 나라로 인식한데서 이 말을 사용하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한편으로는 '구드래'라는 말을 토착신앙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이 주장에 따르면 '구드래'는 굿, 다시 말해 천지신명의 제사를 모시는 곳을 뜻하는 '굿들개'라는 말에서 유래된 것이라 한다. 백제 역사와 관련된 옛 기록를 살펴보면 불교가 정착되기 전까지 토착종교의 신을 모시는 대규모 제천행사를 열었다는 사실이 발견된다. 구드래라는 말은 바로 그 제천행사가 열리는 장소라는 뜻하는 말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있다.
"부여군 문화재 사업소"
선착장에서 내려 조금 걷다보면 구드래조각공원이 보이고 부소산과 정림사지, 백제역사문화관, 궁남지, 국립박물관등 문화 유적지가 지척에 있어 황포 돛배여행과 함께 백제고도를 둘러보기엔 더없이 좋은 코스로 부상할 전망이다.
1400여년이 지난 지금도 백제의 흥망성쇠를 말없이 지켜본 백마강이 역사의 증인이 되어 흐르고 그위로 눈부시게 펼쳐지는 아름다운 풍광이 잔잔한 설레임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언젠가 여행하고싶었던 "부여 이야기" 여기까지 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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